Study On The Formation Of Modern Feminity The Experiences Of Unmarried Female Factory Workers In Korea.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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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혼 공장 여성노동자의 경험을 통해 본 근대적 여성성 형성에 관한 연구

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 전 혜 진

미혼 공장 여성노동자의 경험을 통해 본 근대적 여성성 형성에 관한 연구

지도 조 혜 정 교수

이 논문을 석사 학위논문으로 제출함

2003년 8월

연세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 전 혜 진

전혜진의 석사 학위논문을 인준함

심사위원



심사위원



심사위원



연세대학교 대학원 2003년

6월







표 차례 ··································································································································· ⅲ 우리말 줄임글 ····················································································································· ⅳ 제 1 장 서론 ··························································································································· 1 1절 문제제기 ··················································································································· 1 2절 연구방법 ····················································································································· 4

제 2 장 이론적 접근 ··········································································································· 11 1절 한국 가부장제의 변화와 근대적 여성성 ····························································· 11 2절 근대화 과정에서의 여성의 노동 ······································································· 13

제 3 장 1960, 70년대 공장의 여성노동공간 ································································ 16 1절 노동 공간 형성의 사회적 배경 ··········································································· 17 1. 한국의 산업화와 도시로의 이동 ·········································································· 17 2. 산업구조와 노동공간의 변화 ················································································ 24 2절 노동 공간 내부 ····································································································· 28 1. 공장노동 : 거친 손과 강한 팔뚝, 여자군대 ···················································· 28 2.

회색작업복 : ‘여자’가 아닌 여자 ······································································· 33

3절 노동 공간 외부 ······································································································· 41 1. ‘여공’의 자리 ············································································································· 41 2. ‘정상적’ 여성과 ‘공순이’사이의 거리 ··································································· 44

제 4장 미혼여성공장노동자의 개별적 생존전략 ··························································· 50 1절 독립적 임금노동자로서의 자립가능성 ····························································· 51 2절 가족주의와 여성공장노동자 ················································································· 55 1. 가족복지를 위한 노동 : 가족 내 출세할 남성을 길러내기 ··························· 55

- i -

2. 새로운 가족의 형성을 통한 연줄망 구축 ·························································· 59 3절 신부감 되기 : ‘연애걸기’와 ‘여성다움’ ····························································· 63 1. 공장바깥에서의 ‘여성다움’의 회복 ······································································· 63 2. 결혼을 위한 데이트 전략 ······················································································ 66 4절 사랑받는 아내로 살아가기 : 상향결혼 중심으로 ·········································· 73 1. 계급 상승의 의지와 가능성 : 신데렐라의 꿈 ················································· 73 2. ‘레이디’가 되는 길: 남편의 성공을 내조하는 현모양처 ································· 76

제 5장 분석 및 종합 ········································································································· 83 1절 미혼 여성공장노동자의 여성성 ··········································································· 83 2절 ‘여성다움’ 의 회복 방식 ························································································ 85 3절 생존전략의 선택과 여성성의 재생산 ··································································· 88 1. 미혼 여성공장노동자의 선택지 ············································································ 88 2. 상향 결혼의 경로 ···································································································· 89

제 6 장 결 론 ····················································································································· 92

참고문헌 ································································································································· 95 ABSTRACT ························································································································ 99

- ii -

표 차례 표 1. 심층면접 대상자들의 특성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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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줄임글

미혼 여성노동자의 경험을 통해 본 근대적 여성성 형성에 관한 연구

본 논문은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사이의 초기산업화과정에서 발생 한 산업구조와 노동공간의 변화 속에서, 대규모 제조업 공장으로 흡수되었던 미혼 여성공장노동자들의 경험을 중심으로 한 근대적 여성성의 형성에 관한 연구이다. 본 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초기 산업화 단계의 여성공장노동자들은 가부장제 변화의 과도기적 단계에 놓여 있었다. 평균적으로 60년대 중반에 10대 중반의 나 이로 공장노동에 종사하였던 이 여성들은, 건국 전후에 태어나 6.25 피난민 시대에 유년시절을 보내면서 전통적인 신분 의식과 생존 내지 출세를 위한 가부작정 가 족주의 원리를 몸으로 익혔으며 이것은 그들이 공장노동을 처음 시작하였던 1960 년 중반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여성공장노동자들이 공장노동에 본격적으로 적응해 갔던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에는 고도경제성장으로 생산 가정과 영역 이 엄격히 구분되는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가부장적 가족이 등장하게 되는데, 경제 생산자인 남성의 노동과 공적 정체성에 기생하는 가정 주 부 중심의 핵가족화가 본격화된 1970년대 중반에 바로 이들이 ‘적합한’ 혼기-20대 중반 정도-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그 동안 여성공장노동자들을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에의 ‘희생자’ 에 불과한 나약하고 수동적이며 정태적인 존재로만 바라보거나 70년대 후반 일어 난 여성노조운동의 거룩한 순교자로 바라보는 이분법적인 인식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며, 한국의 근대적 여성성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의 여성공장노동자들의 역 할을 밝혀내고자 한다. 공장노동자출신 여성의 이후 삶들은 하층 계급으로 비참하 게 머무른 것만이 아니라 연애와 결혼의 과정들을 통해 사회 경제적인 상향이동 을 경험하게 되어 지금의 중산층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현 재 우리 나라 중산층 중년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가족의 규범이나 여성성의 기준 을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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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미혼 여성공장노동자에게 1960.70년대 공장의 여성노동공간은 거친 손과 강한 팔뚝, 여자군대로 대변되는 여성성을 해치는 공포의 공간이었다. 또한 그들은 작업 공간을 떠나 먹고 자고 쉬던 공장 밖에서의 삶에서도 ‘공순이’라는 경멸과 ‘비정상 적인 여성’이라는 시선을 느껴야 했다. 노동 작업장의 남성적 규율과 문화는 전체적 으로 여성성의 훼손이라는 인식으로 받아들여져서 공장과 그 바깥을 격리시키고 공장 바깥에서 상실된 여성성을 되찾으려고 대중매체에서 재현되는 여성성을 모방해 간다. 독립적인 임금노동자로서의 자립가능성이 희박한 상황에서 여성공장노동자들 은 노동과 생활에서 충분히 자율적인 존재로 서지도 못한 채 사적 관계망을 도구 적으로 이용하며 변형된 가족주의적 관계망을 유지시켜 스스로 가부장적인 질서 를 강화해 나가고 있었다. 가족주의적인 질서를 선택한 여성공장노동자들은 삶에 서 유리한 전략이라고 판단한 결혼시장에서의 매력적인 신부감이 되기 위해 공장 노동으로 인하여 훼손되었던 여성다움을 극대화시켜 과대 포장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결혼을 통한 신분상승에 성공한 이들은 ‘교양있는 주부’라는 새로운 계급 유지의 가치를 위해 자신을 다시 한번 변신시킨다. 연애 결혼의 대두로 인한 새로운 가족 형성기에서 1960, 70년대의 미혼 여성 공장노동자는 결혼을 주요한 계승상승 전락과 생존전략으로 삼고 있었으며, 이러 한 전략의 실행에 충실하기 위해 자신의 여성다움의 재현을 강조하고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여성성을 충실히 내면화시켜나가면서 가부장적 질서를 더욱 강 화시키는 공모자가 되어갔다. 또한 그녀들의 생존 전략이었던 결혼을 유지하기 위해 ‘사랑받는 아내’로 변신한 여성 공장노동자들은, 남성주변의 생활 구성자로의 역할 을 성실하게 해내는 존재가 되어 갔다.

이렇게 성별화된 노동이 정착되고 시행되면

서 여성들의 내면과 외모는 남성배우자의 욕망과 시선에 따라서 가꾸어지도록 되었으 며, 결혼(가족구성)으로 집안에 안주하여 집안의 가사노동을 담당하는 것이 정상적인 여성의 역할로서 정상적인 여성다움을 지닌 것으로 강제하는 사회 문화적 기제가 작동 하게 되었다.

- v -

제 1 장 서론 1절

문제제기

이 논문은 1960,70년대 한국의 공업화과정에 참여했던 수많은 여성 공장노동자 들의 삶에 대한 추적들이 왜 일시적이고 피상적인 수준에서 머무르고 있는가 하 는 문제의식에서 쓰여졌다. 그 동안 우리는 1960, 70년대의 여성공장노동자를 떠올 릴 때면 그들이 ‘그 시기’에 수행하였던 노동과 그에 따른 산술적인 결과물들 또는 70년대 후반의 노동운동을 생각할 뿐, 그들이 2003년 현재의 우리 나라 중년여성 이라는 사실을 연결시켜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공업화과정을 떠올릴 때면 공장 안에 갇혀 핏기없이 까칠한 얼굴로 재봉틀을 돌리는 여공들의 모습을 상상하다가 어느 순간 헬멧을 쓴 건장한 남자들로 가득 채워진 공장의 모습으로의 전환을 이 루어 낼뿐, 어느 날 공장의 선반 앞에서 사라진 ‘그녀들이’ 어디로, 어떻게 갔는지 에 대해서는 그다지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제까지 한국의 근대적 여성성 형성에 관한 연구는 주로 여성지도자나 여대 생 등의 엘리트를 (또는 그들이 만들어낸 자료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져 왔다. 물 론 이러한 연구들은 엘리트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전파력 내지는 영향력 혹 은 지향성 등을 생각하다면 일면 유의미한 연구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2003년 현 재 한국의 중년여성의 상당수가 공업화 과정에 어떠한 형태로든 노동에 참여했었 다는 사실1)을 생각해 본다면, 그들이 가졌던 노동의 경험과 기억들 그리고 그 노 동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선택했던 삶의 방식들은 결코 지금 그녀들이 형 성하고 있는 문화와 무관할 수가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중산층 중년여성들의 정체성 연구나 중간계급 문화에 대한 연구는 이들의 젊은 시절의 경험과 선택은 그다지 상관없는 것으로 치부한 채 현

1) 1960년에는 전체 여성인구 중 26.8% , 1966년에는 31.5%, 1970년에는 37.7%, 1975년에는 45.7% 의 여성이 경제활동에 참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기획원. 경제활동 인구연보 1960-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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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적인 모습의 분석만으로 이루어져 왔으며, 반면 그간의 여성 공장노동자에 대한 연구는 그들을 여성이 아닌 그 시기의 일시적인 ‘노동자’로서 다루며 그들이 가졌 던 미래에 대한 선택지는 삭제된 채로 이루어져 왔다. 이 논문에서는 한국의 근대적 여성성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기존의 엘리트 중 심의 논의에서 벗어나 여성공장노동자들의 역할을 밝혀내고자 한다. 특히 공장노 동자출신 여성의 이후 삶들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상정하고 있는 것처럼 하층 계급으로 비참하게 머무른 것만이 아니라 연애와 결혼의 과정들을 통해 사회 경 제적인 상향이동을 경험하게 되어 지금의 중산층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에 그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또한 이 논문에서는 1960,70년대의 여성공장노동자들이 당시 그들을 규정하고 통제하려는 담론에 절대적으로 지배받은 수동적인 객체가 아니라, 그 담론사이에 서 자신에게 유리한 생존의 방식들을 발견해 가며 자신이 좀더 행복해 질 수 있 는 전략을 짜고 이를 적극적으로 수행하여 나갔던 적극적인 행위자였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이고자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전략적인 행위과정들을 통하여 그들이 사실 상 한국의 근대적 여성성을 형성하는 데 주요한 몫을 하였음을 보여 주고자 한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의식을 안고 인터뷰대상자를 물색하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 한 어려움에 먼저 부딪쳤다.

그것은 바로 대다수의 그녀들이 자신의 노동에 대한

기억들을 부정하려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때 내가 공장에서 일했다는 사실은 드

러내고 싶지 않다” “ 난 그때 일은 안 물어 봤으면 좋겠는데” 로 대표되는 ‘두려 움의 언어’들이 그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녀들이 결혼을 통 해 사회 경제적인 상향이동을 한 경우 이러한 질문들은 더욱 더 강력하게 거부되 어졌다. 무엇이 ‘ 그 시절’을 말한다는 것을 두렵게 만들며,

왜 그녀들은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부정하려 하는 것일까? 우리는 흔히 일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고 자아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명제를 즐 겨 사용해 왔지만 그녀들에게 일의 경험은 부끄러운 과거의 증거로 나타나고 있 었다. 오히려 일을 하지 않고 있다가 곧바로 결혼으로 진입한 여성들이 “난 그때 그냥 집에만 있다가 세상일은 아무것도 모르고 결혼했다” 는 말을 자랑스러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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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아서 하고 있었다. 이것은 노동을 해야만 했던 낮은 계층적인 문제와는 또 다른 문제였다. 당시 같은 계층에서 일을 하던 남성들이 그들 나름대로 ‘산업역군’으로서의 긍지를 강하 게 드러내며 “너희들은 다 내가 그때 그렇게 일한 덕분에 지금 이렇게 사는 거야” 라며 자신의 노동경험을 떳떳하게 말하는 것과 비교해 본다면, 그녀들의 노동 경 험에 대한 기억의 삭제에는 분명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산업역군’ 으로서의 자긍심마저 압도할만한 ‘파괴된 여성성’에 대한 공포를 그녀들이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공장에서 일하지 않으면 먹고 살수가 없지만 공장에서 일하면 매력적인 여자가 될 수 없었던 그 때, 성실한 노동자라는 자랑스러움이 ‘매력적인 여자되기’와는 상충하였던 그 때, 그녀들은 어떠한 전략들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갈 수 있었을까?

먼저 이 연구에서는 1960년대 이후 이루어지는 공업화 과정에서 미혼 여성공 장노동자들이 어떠한 조건 속에서 어떠한 선택지들을 가질 수 있었는지를 추적해 보고자 한다. 특히 이러한 질문은 왜 그녀들이 공장에서 임금노동자로서 종사하면 서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여성주체로 살기보다는 결혼을 통해 또 다른 가부장적인 가정을 만들어 가는 것을 선택했는가 하는 의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적어도 한 여성의 입장에서라면 공업화 과정이 자신의 삶을 매몰시키기를 강 요한 전통적 질서와 결별하고 자아를 짓눌러 온 신분적 억압을 떨치는 계기가 되 어, 스스로의 욕구를 스스로 충족시키기 위해 노동하며 자아를 돌볼 수 있는 새로 운 삶의 대안을 만들 수 있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여성공장노동자들은 ‘결혼’을 통 해 기존 여러 연구들이 내린 결론-도시 빈민의 형성-과는 다르게 중산층의 안온 한 생활 속으로 편입하는 길을 선호했고, 이로 인하여 주어지는 생산 노동의 면제 라는 특혜를 고마워하며 자신의 가정을 이루어냈다. 생산 노동을 통해서만 생활이 확보될 수 있는 상황에서 생산 노동의 면제라는 특혜는 자립 기반의 상실 또는 사회적 존재의 상실을 반대 급부로 갖는다는 것에 대해 그녀들은 어떠한 대차대조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공장제 기계공업의 시 기에 그녀들과 마찬가지로 무산자가 되어 버렸던 ‘가장’과 나란히 임노동에 종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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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서 가부장적인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버리고 남성의 노동 계급 주변에 생활을 조성하는 의존적인 피부양자로 다시 전락하게 된 것은 정말 그들에게 ‘바보 같은’ 선택이었을까. 아니면 그것은 그들에겐 최선의, 가장 적절한 선택이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여기에서 다음으로 주목하고자 하는 문제는 1960, 70년대의 미혼 여 성 공장노동자들이

결혼을 주요한 생존전략으로 삼게 되었을 때, 과연 어떤 방식

의 전략들을 통해 성공적으로 결혼에 골인하여 공장에서 사라질 수 있었는가 하 는 것이다. 결혼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성별 중심의 분업에서 갈리는 남녀의 삶을 자신의 삶에 보다 유리한 것으로 평가하며 결혼을 꿈꾸게 되었다면, 남성에게 매 력적인 신부감으로 인정받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했던 그 시대의 문법을 여성공장노동자들은 어떠한 방식으로 소화해 낼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러한 과 정에서 그녀들이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수행했던 전략들을 통해 한국의 근대적 여 성성은 어떠한 모습으로 형성되어지게 된 것일까?

2절

연구방법

이 연구는 심층면접을 통한 생애사연구와 텍스트 분석으로 이루어졌으며, 연구 의 대상은 1960-70년대 당시 10대 중반에서 20대 중반의 나이로 공장노동을 했던 여성들을 중심으로 하였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이들은 70년대 후반 노동운동이 활성화되기 이 전에 공장노동을 중단하였던 초기 산업화 시기의 공장 노동자이며 , 주로 경남지 역의 방직이나 직물공장 등 대단위 공장에서 일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여성들이 다. 특히 이들 중 몇 명은 결혼 이후 공장노동을 하던 때와 비교하였을 때 계급적 인 상향 이동을 하여 현 중산층을 형성하고 있는 전업주부들이다. 또한 여기에 대 한 비교 대상을 만들고 보충설명을 하기 위하여 같은 시기 간호사나 선생님과 같 은 전문직종에 종사하였던 여성이나 일반 사무실 근무를 하던 여성들, 그리고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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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시기 공장노동을 수행했던 남성들을 추가로 인터뷰하였다. 심층면접 대상자들의 특성은 표 1과 같다.

표 1. 심층면접 대상자들의 특성 나이

성별

1960,70년 당시의 직업 현재 직업

사례 A

51



공장노동자

없음

사례 B

50



간호사

사회상담사

사례 C

54



공장기사

없음

사례 D

50



공장노동자

없음

사례 E

50



공장노동자

사업

사례 F

51



가사일

상업

사례 G

54



공장노동자

없음

사례 H

52



공장노동자

사업

사례 I

55



공장노동, 의상실

없음

사례 J

54



공장노동자

없음

사례 K

54



공장노동자

임대업

사례 L

60



공장기사

자영업

사례 M

55



공장노동, 미용실

없음

사례 N

56



교사

없음

사례 O

53



공장노동자

없음

사례 Q

68



없음

없음

사례 R

52



공장노동자

보육시설

사례 S

54



공장노동자

없음

사례 T

54



학생, 사무직

없음

사례 U

55



공장노동자

자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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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심층 면접

심층 면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연구자와 참여자간의 상호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들의 삶의 과정에 대한 서사는 연구자의 질문과 반응이라는 조건 속에

서 참여자가 자신의 삶을 이론화하고 재구성하는 간주관성에 의해서 생산되는 것 이다. 연구자가 어떤 특정한 삶의 영역에 대해 질문하거나 어떤 다양한 방식으로 반응하는가에 따라, 보다 구체적이고 심도 깊은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할 수도 있 고 일정한 기억이나 경험을 간과하거나 침묵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이러한 생애사 연구는 한 개인의 생애를 통하여 개인의 경험과 요구를 강조하 는 것으로 개인은 어떻게 사회에 대처하고 또한 사회 안에서 어떻게 발전하는가 를 연구하고자 하는 것이다(줄리아크레인, 아그레시노 1996 :114). 생애사는 기억 에 토대를 두고 있고 구술은 거시적 사회과정과 연결되어 이루어진다. 구술은 현 재와의 관련 속에서 생각되는 과거의 이야기들을 선택하고 재구성하는 것으로 사 적인 기억들과 공적인 재현들 ,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상황과의 상호관계이기도 하다.(윤택림, 1982)

하지만 구술사를 통하여 얻게 되는 기억은 순순하게 개인적

인 것만은 아니다. Popular Memory Group에 따르면 기억의 사회적 생산은 공적 인 재현과 사적인 기억 , 이 두 가지 방식으로 일어난다. 과거에 대한 여러 해석들 의 경합을 통해 지배적인 기억이 공적으로 재현된다면 사적인 기억은 기록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침묵되어 진다.(Popular Memory Group 1982) 따라서 국가기구 들에 의하여 독점된 지배적인 기억들과 기록되지 않고 침묵된 사적인 기억들 사 이에는 괴리가 만들어지고 이 괴리에서 사적이지만 집합적인 기억들은 대항기억 이 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지배적 기억에 의하여 재현되었던 역사서술은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들이 구술하는 집단적 기억과 사적인 기억이 중층적 으로 얽힌 생애사를 읽어내기 위해서는 위계적으로 연결된 여러 층위의 의미구조 를 이해하고 이를 해석가능한 부호들의 상호 연결된 체계로서 읽어내야 한다 . 이 를 위해서 화자와 해석자는 연구 과정에 적극적이고 성찰적으로 개입해야 하는 것이다. (Geertz 1973) 이러한 맥락에서 본 연구에서 사용한 대부분의 심층면접은 자신이 소장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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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1960-70년대의 앨범을 같이 뒤적여 보면서 이루어졌다. 이 연구를 위한 심층 면접과정에서 ‘앨범보기’ 방식이 시도되었던 이유는 우선, 연구자가 선정한 심층면 접 대상자들이 자신의 기억을 서슴없이 말하려 하지 않고 부정하려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진’이라는 것은 한 사람이 가장 기억하고 싶 은 순간 또 이후에 남기고 싶었던 순간의 모습이기에 다른 질문들에 비해 말문을 쉽게 틀 수가 있었고, 자신이 기억하고 싶어하는 것부터 먼저 말하게 함으로서 그 사진 이면의 사실들에 대해서도 보다 자연스럽게 들을 수가 있었다는 장점을 가 지고 있었다. . 이런 ‘말문트기’ 외의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앨범 사진 속에 나타 나고 있는 모습은 당시 그들이 가장 ‘재현’하고 싶었던 모습에 가장 가까웠다는 사 실이었다. 지금의 현장성을 강조하는 스냅사진과는 다르게 당시의 사진은 굉장한 연출 후에야 겨우 한 장 찍을 수 있는 귀한 것이었다. 아까운 필름을 낭비할 수 없었던 그들은 자신의 모습을 최적의 모습으로 바꾼 후에야 비로소 카메라의 셔 터를 눌렀다. 따라서 이와 같은 사진보기를 통해서 당시 그들이 어떤 모습의 연출 을 바랬으며 또 그러한 연출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가 동시에 드러날 수 있었다.

2. 텍스트 분석

심층 면접을 통한 생애사 연구의 보다 구체적인 증거들을 수집하기 위하여 이 연구에서는 텍스트 분석을 보조적인 자료로서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심층 면접과 정에서 면접대상자들에 의해 언급되어진 잡지, 광고, 슬로건 , 매체 , 구전가요 등 을 추적해 보는 것이다. 이 논문에서 이 같은 텍스트들을 보조자료로 선택하게 된 것은 기존의 정치, 사회, 경제, 문학 등에서 매끄럽게 인용되거나 언급되어 왔던 관념적이고 논리적인 글보다는, 가급적 극히 일상적이며 그래서 그 동안 시시껄렁하고 변변치 못한 것 으로 취급되어온 것들 속에서 유용하고 효과적인 문이었다.

단초들을 찾고 싶다는 바람 때

구체적인 삶의 현실 속에서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믿음은 아주 단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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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유효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적당히 익혀져 가공되지 않은 ‘생생한 날 것’들 속에서 추상과 관념의 원칙으로만 채우지 않도록 도와줄 방어막을 만들고자 하였 다. 사실 여성 잡지의 경우 특히 여성을 겨냥하고 편집되며 주로 여성독자들이 구 독한다는 점에서 다른 매스 미디어와는 상이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여성 잡지에 반영되는 이미지는 여성들의 의식 및

자아인식의 측면에서 잠재적이지만

강력한 효과를 미치기 때문에 그간 여성연구자들과 여성 해방운동가들의 관심과 우려를 동시에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 나라에 있어서 잡지는 신 문과 더불어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대중 전달 기관이 되어왔으며, 비록 잡지가 일간 신문만큼 사회적인 사건이나 뉴스에는 민감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그 사회 를 반영하는 데는 더할 나위 없는 깊이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때로는 잡지 가 독자의 취향에 영합한다는 비판도 받긴 하지만, 어쩌면 그렇게 당시의 독자의 취향에 영합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잡지가 그 사회의 거울’이라는 주장이 더욱 부정하기 어려운 근거를 가지게 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런 맥락 하에서, 특히 그것이 여성 잡지인 경우, 그것은 당시의 여성 사회 내지는 여성 생활의 적절한 거울이 될 가능성은 높아진다고 할 수 있다.2)

2) 우리 나라의 여성 잡지는 그 발생부터 사회적인 상황을 많이 반영하여 왔다. 1900년대 에 발간을 보게된 여성지들은 여성 단체나 자선 단체의 동인지적 성격을 띤 기관지였고 주요한 내용은 여성단체들의 취지나 활동 상황이 게재되며 계몽사상과 여자 교육에 대 한 글들이 많이 실렸다. 또 일제하에서는 민족의 개념을 강조하고 독립을 위한 방편으로 여성의 교육을 부르짖었으며 신세계에 대한 소개와 신지식의 보급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수행하여 왔다. 일제의 침략과 민족의 비극이 극에 달한 와중에서 신문화운동의 중추가 된 것은 무엇보다도 잡지였으며 소수의 선각자들이 다수의 대중에게 접근하는 가장 편 리한 방법이었고 한국 근대운동을 정착시키는 집약적인 노력으로 간주되었다. 한편 "소 비는 미덕이다"라는 소비문화시대의 출현과 함께 여성 잡지도 읽는 잡지에서 ‘보는 잡 지’로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특히 TV 라디오 등 새로운 매스미디어의 도전으로 여성 잡지도 구조적인 변화를 하게 되는데, 즉 4.6배판으로 판형이 대형화되고 원색 화 보면을 증가시키는가 하면 기사의 다양화와 오락성을 강조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1955년에 발간되는 <여원>은 현대적인 의미의 여성 잡지의 시작이라 할 수 있으며 뒤 이어 주부생활(1965년 창간) ,여성 동아 (1967년 창간) 가 등장하면서 이들은 적극적인 판매공세를 취하며 이른 바 경쟁적인 시기에 들어가게 된다. 이처럼 우리 나라의 여성 잡지는 다른 나라와 그 성격이 달리 그 출발이 '미개상태'에 있(다고 평가되어지)던 여 성들을 깨우치기 위한 계몽지적 성격을 띠었지만 여성지와 시대적 상황은 서로 분리할 수 없었고 여성지에 주어지는 기능 또한 시대 따라 두드러지게 변화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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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면접대상자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텍스트로 기억되었던 여성잡지의 경우, 면접대상자들이 가장 많이 본 적이 있었다고 말한 <신여상>과 <여원>이 주요한 자료로서 사용되었다. 사용된 여성잡지 자료의 경우 모든 잡지를 대상으로 할 수는 없었기에 시간상에 따른 변화들을 보여줄 수 있도록 일정한 시간차를 두 고 선택되었는데 이것은 연구자 임의대로의 선정이었다. 그 결과 <신여상> 1970 년 4월-6월호, <여원>1966년 7-9월호 1968년 7-9월호, 1970년 7-9월호 ,1972년 7-9월호 , 1974년 7-9월호, 1976년 7-9월호가 선정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여성잡지에서 이 연구에 주제와 관련있다고 판단하여 발췌된 낭만적 사랑 및 결혼, 남녀관계, 가족, 섹슈얼리티에 대한 기사나 광고, 연재소설 연재만화들과 다른 경로들을 통하여 수집된 구전가요, 슬로건 등은 면접대상자들 과의 이야기의 소재로서 심층면접과정에서 다시 사용되어졌다. 따라서

본 연구에

서 사용되어진 보조자료로서의 텍스트들은 심층 면접 과정을 통한 확인을 통해 이러한 텍스트들이 당시의 여성공장노동자들에게 가졌던 영향력이나 진실성의 여 부가 어느 정도 확인되어진 것들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심층면접과정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면,

최초의 심층 면접은 자신이 소

장하고 있는 앨범 등을 같이 보면서 이루어진 일대일 면접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일대일 면접과정에서 얻게 된 정보들에 기반을 하여 그것을 실제 로 보여줄 수 있을 만한 텍스트들을 찾아 자료를 수집하였다. 그 다음에 이루어진 2차 심층면접은 주로 면접대상자들의 친분관계에 따라 모여진 그룹단위에 의한 단체 면접으로 이루어졌다. 사실 이러한 2차 면접은 연구자가 끓임없이 질문을 던 지는 엄숙한 분위기의 면접이 아니라 면접대상자들의 모임에 연구자가 참여관찰 자로서 참여하는 형식이었다. 이러한 모임에서 연구자가 1차 면접 이후 모은 텍스 트 자료들은 이들의 ‘수다’의 재료가 되었으며, 또 다른 자료들에 대한 정보들도 얻을 수 있었다. 단체 면접은 각 개인이 파편적으로 가지고 있던 기억들을 다시 연결시켜 재구성하는데 효과적인 방법이었으며, 각자가 가지고 있는 사소한 기억 들의 공유는 -그것이 같기 때문이건 또는 다르기 때문이건- 이들과의 면접에 상 당한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러한 1, 2차 심층 면접 외에도 보다 더 사적인 질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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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 연구과정에서 추가적으로 발생하는 질문들을 위하여 3차 개별 면접이 산발 적으로 추가되어졌다.

그럼에도 이 연구가 가질 수 있는 한계와 어려움을 먼저 밝히자면, 무엇보다 심층면접의 경우 제한 된 수의사례만을 면접하고 대상자를 연구자가 임의적으로 선정했다는 점이며, 기본적인 심층면접 대상자의 선정이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면 접 과정에서 정확한 진술을 기피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 이 연구에 있어서 큰 어려움이었다. 심층면접 대상자의 경우 자신의 삶을 서술할 때 발생하게 되는 자 기 방어적인 규정이나 긍정적인 측면의 강조로 인하여 실제의 삶의 고통이 제대 로 나타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자신의 1960,70년대 에 대한 기억들을 청년 시절에 대한 막연한 향수나 이상화로 표현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였음을 밝혀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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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이론적 접근 1절 한국 가부장제의 변화와 근대적 여성성 한국이 전통적 농경국가 체제를 벗어나 공업화하여가는 과정에서 몇 가지 가 부장제 변화의 조건들이 형성된다. 우선 대한제국의 성립과 일제 시대 그리고 건 국이후의 혼란기를 거쳐 6.25 피난민 시대를 첫 단계로 본다면, 당시의 사회적 특 성은 나라 전체의 운명을 좌우하는 공식적 제도적인 영역이 크게 붕괴 된 채 생 존 자체가 궁극적인 목표였기에 모중심 가족과 현모양처 이데올로기가 대두되어 여성의 활동이 점차 확대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반면 본격적인 국가 주도의 산업화가 진행되고 대기업이 성장하는 1960년대 후반 이후의 고도 경제 성장 시기에서는, 공/사의 영역이 엄격해지고 공적인 영역이 사적 영역에 비하여 월등히 중요해지기 시작하며 경제 생산자인 남성의 노동과 공적 정체성에 기생하 는 가정 주부 중심의 핵가족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동시에 여성교육이 대중화되고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현저해지면서 전통적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혼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면서 변혁의 가능성을 보이는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조혜정, 1988: 90-91) 이 논문에서 다루고자 하는 초기 산업화 단계의 여성공장노동자들은 이 두 가 지 단계 사이의 과도기적 시기에 놓여 있다고 볼 수가 있다. 평균적으로 60년대 중반에 10대 중반의 나이로 공장노동에 종사하였던 이 여성들은, 건국 전후에 태 어나 6.25 피난민 시대에 유년시절을 보내면서 전통적인 신분 의식과 생존 내지 출세를 위한 가부작정 가족주의 원리를 몸으로 익혔다 .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공 장노동을 처음 시작하였던 1960년 중반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여성공장노동자들이 공장노동에 본격적으로 적응해 갔던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에는 고도 경제성장으로 생산 가정과 영역이 엄격히 구분되는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가부장적 가족이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경제 생산자인 남성의 노 동과 공적 정체성에 기생하는 가정 주부 중심의 핵가족화가 본격화된 197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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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반에 이들은 20대 중반 정도의 ‘적합한’ 혼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초기 산업화 과정에서는 공적 영역과 사적영역이 확실히 구분이 되어 있지 않 은 사회구조적 여건 하에서 생존 자체가 어려웠던 만큼, 전통적으로 도구적 성향 을 길러온 여성의 저력이 가족의 생존을 위하여 한껏 발휘되었고 여성은 한층 높 은 생활층을 향해 돌진해 가는 가족의 실질적인 주관자가 되었다. 이러한 모 중심 의 가족은 태너(Tanner, 1974)가 정의한 대로 내외 구분이 엄격했던 전시대의 ‘자 궁 가족’적 형태나 이후에 대두되는 정서적 역할에 치중하는 ‘엄마주의’ 가족의 형 태와는 구분되는 것이었다.(조혜정, 1988: 103에서 재인용) 하지만 1960년 후반 이후 현저해진 새로운 형태의 가부장제는 남성은 사회적 인 임노동으로 경제적 활동을 독점하고 여성은 무보수 가사 노동으로 가정에 머 물면서 정서적 역할을 수행하는 이분화를 기본으로 하여, 노동시장에 참여하지 않 아도 되는 중산층 여성들이 전문적 직업 활동에 집중하는 남편을 보살피고 자녀 를 양육하는 일에 전념하는 ‘주부 중심의 핵가족’을 이상적 가족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애라는 것은 경제 생산자인 남성이 자신을 편하게 해줄 적 합한 배우자를 모색하는 과정이며, 낭만적 사랑이란 여성으로 하여금 고립된 가정 안에서 남성을 내조하는 소외된 생활에 만족케 하는 주요기제가 된다. (Coppinger and Roseblatt, 1968 ; 살스비, 1985 ) 이러한 부부간의 상호 보완적 역할 분담과 결혼으로 완결되는 낭만적 사랑에의 기대는 이성간의 매력에 대해 개인적 관심을 집중시켰고 이에 따라 남녀의 태도 및 외모상의 차이는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되었 다. 보조적이고 정서적인 역할을 주로 수행할 여성은 ‘여성적’이어야 했는데 이 ‘여 성성’에 관한 규정은 그러한 역할에 맞도록 “유순하고 연약하며 민감하고 감성적 인” 것이었다. 또한 매력적 인간이란 자신의 성에 규정된 대로의 특성을 많이 가 진 사람이며 이에 따라 여성의 ‘여성다움’의 정도가 개인의 정체성 확립의 본질적 인 내용처럼 간주되어졌다. 이러한 성에 따른 차이에 대한 전제는 행위자들에 의 해 자연적 사실 내지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여져 기존의 성역할 분업을 유지시키 는 핵심적 기제가 되었다. (정대현 , 1985 ) 일제 시기를 거쳐 형성된 ‘현모양처’ 이데올로기가 낭만적 사랑을 강조한 ‘사랑받는 아내, 성공하는 남편’의 형태로 발 전되었으며 낭만적 사랑에의 기대 속에 젊은 여성은 더욱 ‘여성적’이 되려고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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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연애의 상대, 궁극적으로는 적절한 동반자를 찾아 헤매게 된 것이다.(조혜정, 1988: 104-107)

2절

근대화 과정에서의 여성의 노동

1960년대 이후 이루어지는 한국의 공업화 과정에서 미혼 여성공장노동자들이 가졌던 선택지들을 생각해 볼 때 가장 크게 생기는 의문은, 왜 근대화 프로젝트 이후 공적 영역에 여성들이 대규모로 진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안정된 노동권을 확 보해내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한국의 공업화 과정에서 여성의 노동에 부여되어진 의미들을 분석함으로써 여성이 근대적 권리로서의 노동권을 확보하지 못한 채 결혼을 통해 또 다른 가부장적인 가정을 만들어 가는 것을 선 택한 이유를 밝히고자 한다. 즉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노동의 의미가 어떻게 성 별화 되며 여성노동자들은 어떠한 방식으로 근대화 프로젝트에 편입되는가를 분 석하고자 하는 것이다. 개인에게 있어 노동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변화해왔고 노동의 주체가 누구이 며 노동의 성격이 무엇이냐에 따라 사회적으로 차별적인 평가를 받아 왔다. 국내 의 정치 문화적 맥락에서도 여성들의 노동력이 대규모로 생산의 현장에 투입되는 것과 동시에 그들의 성성은 사회적 제관계 속에 다양한 담론의 형태로 새롭게 규 정된다.(Ong, 1987) Ong은 일본계 다국적 기업에 고용된 말레이시아 여성들의 인류학적 사례 연구 를 통해 성(gennder)관계가 어떠한 방식으로 특수한 역사적 맥락에서 재구성되는 지를 밝히고 있다. 그는 일본계 다국적 기업에 편입되어 가는 말레이시아 농촌 여 성들을 둘러싼 사회적 담론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전통적으로 규범화된 여성성과 전지구적 자본의 경영 전략과 여성들이 새롭게 규정하는 자신들의 변화된 성 역 할 등이 어떠한 방식으로 대립하고 상호 작용하는지의 과정을 분석해 내고 있다. 이 같은 근대화 과정에서 여성의 노동이 가지는 의미에 대한 연구는 이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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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노동참여를 통해 가부장제로부터 얼마만큼의 자유를 확보할 수 있으며 여 성의 삶과 주체성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Lim의 연

구(1993)에서는 홍콩 여성들이 수행한 공장 노동의 분석을 통해 제 3세계 여성에 게 제공되어진 새로운 기회와 재정적인 자원의 확보를 강조하면서, 그들이 이전의 종속된 사회적인 지위에서 자유를 확보하는 기회를 얻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Salaff(1981)는 여성들이 이러한 과정을 통해 부분적으로 더 많은 사회적인 자유를 얻기는 하였지만 자식으로서의 효와 강한 가족유대라는 가부장제 안에서 의 부분적 자유임을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1960년대 근대화 프로젝트 과정에서 공적영역으로 대규모로 진출하였던 여성들의 노동은 가부장제를 극복할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일 단 산업 사회는 근본적으로 가부장제를 극복한 근거를 제공하고는 있다. 우선 생 산이 공적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임금 노동화함에 따라 개인의 경제 자립이 가능 해 진 것이다. 이와 더불어 개인의 인격을 존중하는 이념이 대두되고 점차 평등 원리가 사회적 상호 작용의 원리로 뿌리를 내리게 된다. 가족 제도상에도 변혁이 일어나 친족적 지배를 벗어나 부부 중심의 핵가족으로 이행하여 가게 된다. 특히 본격적인 국가 주도의 산업화가 진행되고 대기업이 성장하는 1960년대 후반 이후 에는 여성교육이 대중화되고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현저해지면서 전통적 가부장 제와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혼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면서 변혁의 가능성을 보 이는 시기라고 말할 수도 있다. (조혜정, 1988: 111) 하지만 김현미의 연구(2000)에 따르면 한국노동자 계급의 일차적 구성이 주로 나이 어린 하층계층의 여성들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은 외국의 자본을 끌어오기 위한 유인의 전략과 동원과 통제를 가능하게 하기 위한 선택과 무관하지 않다. 여 성들은 수출 지향제조업의 구조적 취약점인 세계소비시장에 대한 예측 불가능성 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한 가변 노동력으로,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비보호 노동력으로 선택된다. 한편 한과 링(Han and Ling, 1998 ; 김현 미, 2000: 41에서 재인용)이 규정한 것처럼 박정희 정권의 근대화 프로젝트를 ‘초 남성주의적 발전주의 국가’의 전형으로 규정하였을 때, 국가의 초남성성은 상대적 으로 모든 사회적 영역의 ‘여성화’를 요구하며 전 자본주의 단계의 고유한 문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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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들을 새롭게 강화시켜 나가게 된다. 이때 유교적 부형주의의 여성됨은 내훈의 여성 이미지를 기반으로 하여 여성노동자들이 자신들이 하는 노동을 의미화하는 데 있어 주요한 가치관을 제공해 주었다. 근대화 프로젝트에 대규모로 편입된 생산직 여성근로자들의 중첩적인 역할과 사회적 위치는 여성노동자가 이미지화되는 방식에 있어서도 모순적인 성격을 드 러낸다. 국가를 위한 희생과 인내를 강조하기 위해 여성들은 종종 비성화된 ‘산업 전사’나 ‘산업역군’으로 묘사되고 여성노동자의 특수한 조건과 이해는 ‘무성적’인 차원으로 격하되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취급된다. 동시에 가족과의 관계에서 는

책임있는

딸로,

계층적 위계상에서는

공순이로 비하되어

불려진다.(Kim

Seung-kyung 1997) 이처럼 1960, 70년대에 대규모로 공적영역에 진출한 여성들은 이런 의미에서 사적영역과 분리된 이성과 합리의 공간으로서 공적 영역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 사적 영역의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내재된 공적 영역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김현미. 2000: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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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장 1960, 70년대 공장의 여성노동공간 본 장에서는 1960, 70년대 여성공장노동자들의 노동공간 내. 외부의 삶을 그들 의 목소리와 기억을 통해서 재구성 해보고자 한다. 한 개인의 생애사를 통해 개인 의 경험을 바라본다는 것은 개인이 어떻게 사회에 대처하고 또한 사회 안에서 어 떻게 변화해갔는가는 연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특히 2절과 3절에서는 그들이 ‘여성’노동자였다는 사실에 그 초점을 맞추어 공 장과 공장 외부에서 어떤 ‘여성’으로 그려졌는가를 드러내 보고자 한다. 여성공장 노동자가 자기에 적합한 생존전략들을 모색하는 과정에 있어 그들이 살아온 공간 을 드러내 보이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 공간을 그려내는 작업을 여기에 서는 여성공장노동자들의 기억에 기대고자 한다. 이것은 한 개인의 기억과 그 기 억에 대한 구술이 거시적 사회과정과 연결되어 이루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며, 여성 공장노동자들의 사적인 기억들과 공적인 재현들은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상황과 의 상호 관계까지도 드러내줄 수 있는 것이다. 먼저 1절에서는 노동공간 형성의 사회적인 배경부터 살펴본 후, 2절에서는 노 동공간내부에서 그들이 어떤 노동을 했으며 그러한 노동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녔고, 또 공장노동을 수행하는 여성 노동자들은 어떤 사람으로 말하여졌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이를 위해 당시 대규모 공장노동을 경험했던 여성들과 그들과 같 이 일했던 남성노동자들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하여 연구를 진행하였다. 3절에서는 여성노동자들이 작업 공간을 떠나 먹고 자고 쉬던 공장 밖에서의 삶을 추적해 볼 것이다 . 일상에서 항상 마주쳐야 했던 사람들이 그들을 어떠한 시선으로 바라보 았으며 또 그러한 시선은 여성노동자에게 어떤 경험으로 남아있는 지를 보기 위 해, 여성공장노동자의 기억을 따라 공식적인 매체는 아니었지만 대중들 사이에 구 전되었던 노래나 여성잡지들을 보충 자료로 삼았다3). 3) 한 가지 주지해야 할 사실은 구해근의 연구(2002)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당시의 여 성공장노동자들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할 때 남성 여성공장노동자 모두가 직면한 비인 간적인 문제가 너무 커서 이것들을 전체 노동자의 관점에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으 며, 심각한 여성적 쟁점들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여성노동자들은 이것을 성문제 라는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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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노동 공간 형성의 사회적 배경

1. 한국의 산업화와 도시로의 이동

이농 현상을 사회학적으로 기술하자면 그것은 하나의 사회 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농 그 자체는 우선 지리적으로 농촌이라는 지역 공동사회에서 도시라는

이질적인 지역사회로 옮아가는 것이므로 단순한 수평적 이동으로 볼 수 있다. 하 지만 한국의 초기 산업화 단계에서의 이농 과정을 살펴보자면 농촌을 버리고 도 시로 이주한 사람들의 사회경제적인 계층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할 순 없다. 1960년대 이후 수백만의 농민들과 또 그들의 자녀들이 도시의 노동자로 변화되어 갔고 이 모든 변화들이 한 세기가 아닌 한 세대 안에서 일어나면서, 한국은 19세 기 유럽의 변화에 비견할 만한 거대한 경제적 사회적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영기의 연구(1988)에 따르면 , 1966년에서 1975년 사이에만 약 510만명이 농 촌에서 도시로 이주하였으며 , 1975년에서 1984년 사이에 또 590만명이 도시로 이 주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4) 이는 무려 약 1100만명의 농촌인구가 수출 주도형 산업화 시기에 도시로 이주해 갔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더구나 이농인구 중 상당

수가 가족을 농촌에 남겨두고 온 단신이농자들이며 , 또 대다수가 젊은 사람들이 었다5)고 한다면 실제적인 농업 노동력의 감소는 이보다 더 컸다고 볼 수 있다. 왜 사람들은 농촌을 떠나간 것이며, 어떤 과정을 밟아 농촌 사람들이 서울 또는 다른 도시로

정착하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들은 결과적으로 어떤 생활을 영위하

게 되었는가.

일반론의 입장에서 바라보자면 공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공장이 있는 도시에서

점에서 자신들의 경험을 이해할 수 있는 적절한 해석들이나 언어를 갖지는 못했다는 것 이다. 4) 이영기 . 1988. 「농민층 분해의 동향과 계층 구성」.『한국 농업, 농민문제 연구』1, 한 국농어촌사회연구소 엮음. 서울 : 연구사. 5) 이농인구의 3분의 2가 30세 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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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노동력이 집중하게 되고 농촌에서 가내 공업적인 방법으로 상품을 생산하던 사람이나 그 가족들이 도시로 이동하게 되며, 그 밖의 기술이 없는 농민이라 할지 라도 농토의 기계화와 더불어 생긴 유휴 노동력이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도 시로 흡수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러한 도시화의 과정에서 이농을 초래하는 힘은 내치는 힘과 잡아끄는 힘의 두 가지 요소들을 통해 설명된다. 서구 근대화에서 보 면 내침을 받았다기 보다는 오히려 끌림이 있어 이농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일 반적인 입장이다. 하지만 우리 나라의 경우는 이러한 설명과는 다른 모습들을 지니고 있다. 먼저 우리 나라의 인구 이동은 해방과 사변을 계기로 하여 다른 뒤늦은 사회와도 구별 될 정도로 격심한 것이었으므로, 도시화 현상은 이미 일그러진

모습으로 나타나

고 있었다. 또한 서울의 노동 인구의 산업별 분포만 살펴보아도 서울이라는 대도 시는 주로 서비스업이나 상업 등 제 3차 산업이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소비

도시의 성격을 면치 못하였으며 60년대 전까지 서울은 생산활동의 중심이라기보 다는 정치행정의 중심지로 남아있었다. 이러한 특성으로 비추어 볼 때 도시가 취 업의 기회라든가 공업화에 따른 흡인력을 가지고 있어서 농촌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은 상당부분 줄어들게 된다. 이는 도시에 전혀 매 력이 없고 잡아끄는 힘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더 큰 힘, 출발점 은 농촌의 내치는 힘이 아니었을까 생각하는 것이다.6) 흔히 이와 같은 이촌 향도의 경향을 설명하기 위하여 촌락 자체의 내적 요인 과 도시가 가진 흡인력을 설명하자면, 이런 현상은 근대 자본주의의 발달과 가장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일어난 현상으로 파악된다. 일반적인 수준에서 논의할 때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 지배적인 체제하에서 생산력이 낮은 농업이 불리한 위치

6) 사실 60년대 초기의 경제개발 전략은 해방이후 과잉도시화가 안고 있는 사회경제적 문 제해결을 위한 전략적 돌파구로 파악할 수 있다. 도시주변에 산재해 있는 비공식부문과 과잉인력을 활용하는 노동 집약적 경공업중심의 경제개발 전략이 적극적으로 모색되면 서 공업화초기의 노동 집약적 산업화정책은 유휴 노동 인력의 활동이라는 차원으로 전 개되었다. 이후의 도시의 흡인력은 시간이 지나면서 생겨난 것으로 개발 독재정권의 경 제발전 논리는 불균등 성장 또는 거점 성장방식을 통한 효율성을 추구하는 ‘집적의 경 제’, ‘규모의 경제’로 나타나 도시주변의 산재한 잉여인력뿐만 아니라 농촌 인구의 지속 적인 유입을 유인하는 흡인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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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놓이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게다가 공업 자본이 우세한 입장에 오르고 농업은 순전히 공업 생산의 부속물로 전락하는 경향이 나타나며, 국제적 경쟁을 위해 생산비를 감소시키는 한 방편으로 노동자의 생활비를 절약하려 하고 이를 위해서는 곡가를 억제하는 정책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상대적 억압으 로 농촌의 생산성은 저하되는 데에다 설상가상으로 농촌의 인구는 늘어나 우리 나라와 같은 집성식 촌락에서는 토지개혁이래 토지 경장의 규모가 점점 더 영세 화하는 경향이 짙어가고 있었다. 따라서 화학비료나 농업 기술 농약 등의 이용으 로 약간의 상대적 생산성 증가가 있다고 할지라도 생산비와 수지 타산이 맞지 않 는 등 농촌의 경제적 조건은 점차 불리해져 갔다. 이렇게 농촌을 떠나 도시로 가 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 사람이 속해있는 경제적 상황에 따라 너무나 다른 모습으 로 나타나고 있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 진학을 포기한 채로 부산에 가서 취직을 하게 되었다. 당시 밥도 배불리 먹지 못하는 상황에서 초등 학교 시절에도 나 무를 해다 생계에 보태곤 하던 상황에서 중학교 진학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동생들 교육비라도 벌어서 부모님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으로 떠나 게 된 길은 30리의 길을 울면서 걸어갈 정도로 하기 싫은 선택이었다." (51세 여성 A씨, 빈농 출신) "고향집은 떠날 때는 대구로 유학하는 기쁨에 들떠 있었고, 오빠 2명 역 시 유학을 하고 있었기에 세 자매와 헤어지는 섭섭함 정도의 기분이었 다."(50세 여성 B씨, 부농의 딸) "남한강 대홍수로 인하여 고향이 폐허가 된 뒤 충주댐 건설공사로 인하여 수몰지구가 되어 어쩔 수 없이 도시로 가야 하였는데 떠날 때의 기분은 지금도 생각하기도 싫다. "(54세 남성 C씨, 자영농출신)

농촌을 떠나 도시로 옮겨가는 사람들 중에는, 우선 영세한 농업 노동에 종사하 는 빈농층이 많았고 이들은 대개 경제적인 이유에서 이동의 이유를 찾아볼 수 있 었으며 전 가족이 이동하거나 단독이농을 하더라도 이후의 수입이 이농하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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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중요한 수입원이 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중대농층의 이농은 인구 이동의 비율은 상당히 높지만 이들의 경우에는 단독 내지 부분적 이동이 주로 나타나고 대개 전학 진학 전직 등의 이유들로 이동을 결정하고 있었다. 이처럼 농촌에서 도시로 빈농층이 대규모 이동을 하게 만든 가장 핵심적인 원 인은 바로 정부의 농업 정책이었다. 박진도의 연구(1988)에서 밝혀지고 있는 것처 럼 , 박정희 정권 초기의 농업정책은 농민부채 탕감이나 농산물 가격 안정 등 과 감한 친농업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으며7) 농업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새마을 운 동을 실시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농업 정책의 기본적인 성격은 도시 임금노 동자의 식량비용을 줄이기 위한 저곡가 정책을 유지하는 것이었으며 농가소득 중 에서 농업 외 소득의 큰 부분은 바로 도시로 이주한 가족원이 보내주는 이전소득 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들을 통해 이촌 향도 현상은 농촌의 빈곤으로 인한 노동력의 유출과 도시산업의 노동력 유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은 사실이나, 도시의 흡인력보다 농촌의 방출력에 의하여 일어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한국의 초기 산업화 단계 에서 필요한 노동력을 농촌지역의 잉여노동력으로부터 끌어올 수 있게 되었다.

농촌 생활이 어려웠던 것은 비단 근대 자본주의 발달 이후의 일만은 아니다. 과거의 전통 사회나 봉건 사회에서 농민들은 늘 수탈과 착취의 대상이었으며 고 통스러운 삶을 영위하였다. 하지만 그때의 배출 요인인 수탈과 곤궁도 대부분의 농민에게는 체념하고 살아야 하는 굴레 인양 여겨졌고 그들로 하여금 땅을 버리 고 길을 떠나게 할만큼 강하지는 못했다. 농촌을 버리고 밤중에 도시로 향하는 것 은 항상 극단적인 예외에 속하는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지금까지의 기존 연구 들이 경제적인 측면에서 진행되었다면 여기에 보다 사회 심리적인 요소들을 다루 어 져야 필요가 있다. 60년대 이후 나타나는 이농 현상은 “못살겠으니 떠나야겠고, 떠날 바에는 기회 가 많으리라고 생각되는 도시로 가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끼어서 7) 박진도. 1988 . 「8.15 이후 한국농업정책의 전개과정」. 한국농어촌 사회연구소 엮음. 『한국 농업, 농민문제 연구』1, 서울 : 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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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억척스럽게 살아볼 도리밖에 없다”라고 생각한 사람의 수가 급격히 늘었 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들을 가지게 된 사람들은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 생각했을 까. 어렵게 살기는 매 한가지였는데 왜 그들의 조상은 잠자코 땅을 파며 살아왔으 며, 갑작스럽게 사람들을 자극하게 된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모 습을 제시해 준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사람들에게 스스로가 다른 사람들보다 못산다는 상대적 열등감이 생기고 농촌 보다 기회가 많은 곳이 저 다른 곳에 있다는 인식을 하게 만든 원천은 교육의 전 파와 매스미디어, 군대 복무 경험과 선거 경력, 도로 및 철도의 발달과 전쟁에 의 한 인구 이동 등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과정은 의식 공간의 확대화, 전시효과에 의 한 열망 수준의 상승 및 사회 이동에 관한 가치관의 변화 등을 가져오게 된 것이 다. 지금까지 별로 불만이 없거나 아니면 좀 어려워도 그것이 주어진 운명이려니 하고 체념하던 농민들이, 이제는 자신이 얼마나 못사는 사람이고 하지만 잘 살아 야 하는 사람이고 또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서 가슴은 부풀 어오른다. 이른 바 기대의 수준이 부쩍 올라가게 된 것이다. 기대가 향상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는 조금도 잘못되었다던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부풀 은 기대에도 불구하고 실제에 있어서는 그 기대가 채워지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공업화 초기의 사회에서 농업이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되는 것은 거의 필연적이라 고 할 수 있다고 할 때, 농촌의 생활이 점점 피폐해지는 경향이 강해지는 만큼 사 람들의 부풀은 기대는 점점 꺾이게 마련이고 여기에서 심각한 욕구불만이 일어나 는 것이다. 욕구불만이 생긴다는 것만으로는 사람이 쉽사리 움직이게 되는 것은 아니다. 불만을 품는 사람은 으레 있기 마련이고 이들의 힘이 점점 자라날 수 있다면 구 조적인 변화나 변동을 초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이와 같은 불만 분자들이 세력을 펴서 구질서에 반발할 만큼 힘을 갖추지도 못했거니와 그런 반 항쯤은 물리치고 억압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구조 자체가 굳어 있었다. 구조적 융 통성을 허용하는 가치의식이 개발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외부에서부터 갑자기 새로운 가치관이 거대한 물결로 밀려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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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낡은 구조에 급작스러운 타격을 주게 되었다. 한곳에

머물러 일생을 살아야

한다는 사람들의 생각에 변화가 오고, 횡적인 지리적 이동은 물론 종적인 계층 이 동도 가능하다는 이동 성향 내지는 이동 가치를 지니게 된 것이다. 이러한 가치 지향 중의 하나가 공간 의식의 확대이다. 전통 사회의 사람들은 자기가 몸담아 사 는 지역 공동체의 테두리밖에

보다 넓은 사회가 있다는 공간 의식을 추상적으로

가지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전술한 여러 가지 사회 변동의 자극 요인들로 인하여 농민들의 공간 지향은 확대되었고 나아가 도시라는 바깥 세상이 하나의 준거집단 으로서 강력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시골은 발전 없는 생활일 뿐이었을 것이다. 본인이 무엇인가를 하려고 노력하면 발전 할 수 있게 도움 주는 곳은 도시이다. 도시에서의 삶이 풍 요롭지만은 않았지만 ‘암담한’ 고향보다는 만족한다." (50세 여성 D씨) "산업화로 인한 성장은 도시 농촌간의 빈부의 격차를 심하게 하였다. 고 향을 떠날 때를 지금 생각해보면 고향을 떠난다는 생각보다는 그 시절보 다 더 좋은 삶을 영유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고향을 떠났다고 말하고 싶 다.”(50세 남성 E씨)

도시의 존재를 의식하고 그것이 하나의 준거집단이 되면 스스로의 모습이 초 라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게다가 나도 잘살 수 있다는 기대가 있는 데도 잘 살 여건은 안되고, 여기에 이제까지 살던 구조적 질서는 거부해도 좋고 , 끝으로 움직인다는 것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끝으로 여러 가지 현실 적인 조건을 따져본 후 짐을 싸고 떠나는 일만이 그들에게 남은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떠났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이 떠난 후의

자리잡을 것을

확실히 하고 떠나는 것은 아니었으며 어떤 제도적인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개 연줄이 있거나 서울에 가족 또는 친척이 있는 사람이면 이들과 연락해서 정 착하는데 도움을 얻었으며 공업 노동자들의 상당한 수가 도시에 온 뒤에도 곧바 로 공장에 취직한 것이 아니라 잡역노동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연줄을 대서 공장에 들어온 경우로 나타났다8). 농촌에서 온 사람들도 잡역 날품팔이 식모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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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에서부터 출발하여 우선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향상되었다고 하기는 어려운 것이 농촌에서 도 어차피 하류층에 있던 사람들이라고는 하지만, 서울의 일반적인 생활 수준에서 불 때의 하류란 농촌에서의 하류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저하된 지위라고 할 수 있 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농촌에서 노동품을 파는 것보다는 도시에서 지 게꾼 노릇 하는 것이 수입은 나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생활하는 환경에서 보면 상 대적으로 지위가 하강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또한 도시성 또는 도시적 생 활양식에 젖지 못한 이농민들이 도시 환경에서 겪는 심리적 적응과정은 충분히 문제가 되었다.

“주택문제가 어려웠으며 논밭을 팔아 가지고 온 돈으로 집 한 채 마련하 기가 힘들었다.”(54세 남성 C씨) “결혼하여 남편 따라 도시로 옮겨 온 것인데 어려운 경제적 여건으로 인 하여 참담한 기분이었다. 도시는 이동인구가 많아서인지 주택난이 심했 다.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집값을 마련하기 위해 전력투구하다보니 다 른 생활들을 포기해야 했다.”(51세 여성 F씨)

경제적 지위의 상대적인 하강과 도시 생활양식에 적응해야 하는 이중적인 심 리적 압력을 받을 때 생기는 좌절감과 불안, 언제까지고 채워질 수 없는 욕구불만 이 계속되고 이농민들이 형성하는 새로운 지역은 주로 빈민가의 성격을 띠게 되 었다. 주택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므로 움막이나 판자집을 지었으며 생활의 곤궁과 여러 번의 심리적인 긴장으로 개인적 관계는 불안정하게 되었다. 이제 이들의 2세 는 부모가 통제할 수 없는 수준의 문제를 가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세대를 통제하 고 사회화하는, 그 당시 이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녔을 가정의 권위유지 방식은 상실되어져 갔다.

8) 서울의 산업 구조가 서비스업과 상업 중심으로 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유입 인구가 별다 른 밑천이나 기술 없이도 쉽사리 자리 잡고 우선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크 게 지니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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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산업구조와 노동공간의 변화

1961년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82달러에 불과했으며 1965년에 빈곤선 아래에 있는 인구비율은 무려 40%에 이르고 있었다. 총인구의 70%이상을 차지하 고 있던 농촌은 저곡가 정책으로 인해 농업생산성은 저하되고 고리채의 폐해는 심각한 지경에 있었으며 미국의 원조마저 5.16이후에는 대폭 삭감되었다.

말하자

면 한국의 1960년대 초반은 사회전반에 빈곤이 만연하고 있던 시기라고 할 수 있 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2년의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당시의 절박한 정 치적 경제적 상황의 필연적인 결과물이었으며, 박정희 군사정부는 선택의 여지없 이 경제발전 청사진을 제시하고 또 성공적으로 수행해야만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조국 근대화란 경제발전과 같은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향순의 연구(2000)에서 밝혀지는 것처럼, 1962년 1월 5일에 확정 발표된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자립경제의 달성과 공업화를 위한 기반 조성을 목표 로 내세우며, 정부가 직접 관여하거나 간접적으로 유도하는 이른바 ‘지도받는 자본 주의 체제’를 방침으로 하고 있었다.9) 이는 국가가 주도적으로 산업화를 계획하고 추진한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밝힌 것이며,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입안과 추진 과정을 통해 산업화 국가로의 변신을 시도했음을 의미한다10). 하지만 이 경 제발전 청사진은 제 1차 계획 연도의 시작 무렵부터 이미 차질을 빚게 되어 계획 을 전면적으로 수정 보안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11), 국내 자본의 조달이 여의 치 않자 국가는 외국자본의 도입을 적극적으로 시도하면서12) 외환 조달을 위해 9) 이향순 . 2000. 『시장에 던져진 노동계급』. 서울 : 학문과 사상사 10) 제 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은 미국 정부나 원조 당국과의 협의에 의해 입안된 것이 아 니라 한국정부가 단독으로 만든 것이었다. 이 계획안은 미국에 의해 혹평과 수정 요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연평균 경제 성장률을 7.1%라는 고성장률로 선택하였으며, 이는 박정희 군사 정부가 경제안정보다 성장 기조를 택했음을 말한다. 11) 재원을 확보하기 위한 방편으로 1962년 6월에 전격적으로 화폐 개혁이 단행되었으나 , 지하의 잉여 자금을 은행권으로 끌어들이려는 당초의 의도와는 달리 최소 생활비 이외 의 예금 인출 금지가 기업의 자금 경색을 가져옴으로써 오히려 경제 파국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2) 국가는 1960년대 초에 원조중심의 외자도입에서 차관 형태로 전환하고 차관에 대한 지 불 보증법(1962년)과 장기 결제방식에 의한 자본재 도입에 관한 특별조치법(1962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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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대체 산업화에서 수출 지향적 산업화로 근대화전략을 선회시키게 된다13).(김 철환 , 1999) 수출 주도적인 경제성장 전략은 비교 우위 산업과 그 생산품에 대해 다양한 정책적인 지원을 집중함으로써 세계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을 가지게 해서 수출을 증대시키는 것으로, 수출 제일주의에 의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한 한국의 산 업화 국가는 무제한적인 재량권을 발휘하면서 자본과 노동은 국가에 종속된 존재 가 되어갔다. 이렇게 한국에서 산업화 국가는 1960년대 초반의 수입 대체적인 산 업화에서 후반의 수출 주도적인 산업화 전략으로 선회함으로써 점차 구체적인 실 체를 드러내게 된 것이다14). 이러한 수출 지향적 산업화 전략은 주로 여성노동력에 크게 의존하였다. 1965 년 이후 여성노동자들의 산업 임금 노동 부문으로의 진출은 극적으로 증가하였으 며 여성노동자들은 섬유, 의류, 전자산업 등의 몇 개의 경공업에 집중되어 있었다 (서관모, 1987: 171) 이들 중의 절대 다수는 10대 말에서 20대 초반의 반숙련노동 자였으며, 또 이들은 농촌 출신의 나이 어리고 학력은 낮은 미혼여성들이었다(구 해근, 2002: 66)15)

하지만 이러한 여성노동자 수의 증가는 수출 주도형 산업화

초기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는 현저하게 나타났지만 1973년의 ‘중화학 공업화 선 언’을 기점으로 한 국가의 중화학 공업 중심의 산업구조 개편이 본격화되면서16) 둔화되기 시작한다.

경공업에 종사하는 제조업 노동력의 비율은 1970년 중반까지

는 약 60%로 지속되다가 1980년대 중반 47%로 감소하며 , 중화학 공업에 고용된 제조업 노동자들은 1973년 39%에서 1985년 53%로 증가되어 갔다. 새롭게 떠오르 제정하였다. 또한 1966년에는 정부가 지불 보증을 하고 이윤과 원금 및 과실 송금까지 보장하는 외자 우대를 명시한 외자 도입법을 제정하게 된다. 13) 김철환. 1999. 「한국 수출구조의 변화 」『한국 경제』. 서울 : 한울아카데미 14) 이러한 경제발전 전략은 성공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1963년 당시 8700달러에 불과하던 수출은 1970년에 이르러서는 8억3500만 달러로 급증하였고 국민총생산의 증가율은 매 년 10%, 제조업의 성장률은 거의 19%에 달하였다. 15) 1966년에는 전체 여성 공장노동자의 약 90%가 29세미만이었고 절반 정도가 20세 미만 이었다. 16) 1973년의 중화학 공업 발전을 위한 야심한 계획은 철강 전자 석유화학 조선기계 비철 금속 등의 6개 전략 사업을 선정해 이들 산업 부분에 정부의 정책 자금을 집중 투자되 었다. 이러한 계획들은 이후 중동 건설 붐과 베트남전 참전으로 인한 한국기업들의 미국 수출 특혜로 이어지면서 그 성과를 나타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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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중화학 공업에 종사하는 노동력은 대부분 남성이었으며 결국 제조업에서 여성 노동력은 상대적으로 감소하게 된다.

1960년대에 시작한 이러한 한국 산업의 변화는 경제구조를 엄청나게 변화시켰 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일하고 생활하는 방식에도 질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 었다. 산업화가 시작되기 전인 1950년대 말까지만 해도 인구의 절대다수는 농촌지역 에 거주하였으며

국민총생산의 절반이 농업생산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산업화

의 진전에 따라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농업의 비중은 1960년 39.9% 1970년 31.1% 1980년에는 14.6%로 점차 낮아져 갔고(구해근 2002 : 63), 산업부문간의 대 규모 노동력이동을 발생시켰다. 이러한 농업에서 2, 3차 산업으로의 대규모 노동력 이동은 필연적으로 한국 노동력의 급격한 프롤레타리아트화를 초래했다( Koo, Hagen. 1990)17) 대규모의 노동력들이 농촌으로부터 끓임없이 확충되어졌다. 서관모의 연구 (1987)에 따르면, 매년 수 천명의 이농민들이 공장으로 들어갔고 도시의 임금노동 자수는 1960년 130만명, 1966년 201만명, 1970년 340만명으로 늘어갔다.18) 송호근 의 잇따른 연구(1991, 1994)에서 잘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자본가들은 안정적이고 헌신적인 노동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특별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었고 , 국가 가 정치적인 수준이나 작업장 수준에서 노동을 통제하는데 지배적인 역할을 대신 담당해 주었다. 노동자의 복지 향상이나 임금인상에 힘쓰는 대신

저임금으로 노

동력을 착취하여 이윤을 극대화하더라도 상대적으로 풍부한 노동력은 계속 공급 되었으며, 국가는 공업 고등학교나 기술학교 등을 통하여 노동력의 훈련과 기술향 상에 기본적인 역할까지 담당해 주었다.19) 1970년 대 말까지 꽤 큰 규모의 유휴

17) 여기서의 프롤레타리아트화 (Proletarianization)란 노동력이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하 고 자기의 노동력을 팔아서 생활해야 하는 위치에 놓이는 것, 즉 임금노동자가 되는 것 을 의미한다 ( Koo, Hagen. 1990. " From Farm to Factory : Proletarianization in Korea" American Sociological Review 55 (October) ) 18) 서관모. 1987. 169면 「한국 사회 계급 구성의 연구」.서울 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19) 송호근. 1994. 『열린 시장 , 닫힌 정치』. 서울: 나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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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력이 반숙련 노동자로서 농촌지역에 남아 있었고 여성인력 또한 산업예비군 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기에, 198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경영자들은 해고를 무 기로 하여 섬유와 전자산업 등의 경공업 제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위협할 수가 있었다20). 공장노동자가 된다는 것은 열악한 작업 조건하에서 막대한 노동강도를 거뜬히 견뎌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위계질서와 권위에 대한 존경, 그리고 협동 근면 가족주의를 강조하는 유교문화는 노동자들에게 복종적인 태도와 경영자에 대한 협조를 요구했으며

경영은 온정주의적이고 가부장제적인 권위형태를 띄고 있었

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공장 안에서 극도의 착취적이고 비인간적인 노동 조건하의 잔인한 노동세계를 경험하면서도 그러한 노동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왜 비인간

적인 조건하에서 노동자들은 육체적 고통과 건강상의 피해를 참아가면서 일했는 가? 물론 이들은 이론적으로는 자유계약 임금노동자였기 때문에 간단히 공장을 그만둘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공장노동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1980년대에 이르기까 지 구직이 여전히 힘든 상태였으며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해고의 두려움에 시달려 야 했다. 따라서 자신과 가족의 경제적 지위를 위해 노동하는 상황에서 가부장제 적 전제주의적인 경영자의 권위는 견디어야 하는 것이었다. 도시로 이주한 가족이 보내는 이전 소득 외의 농업 외 소득기회의 부재는 이들의 이농의 성격을 결정지 었다. 그들은 다시 농촌으로 돌아올 수 없었으며 설사 가족이 남아있더라도 돌아 올 의도나 가능성이 없는 실질적인 영구 이농의 상태였기에 그들이 가질 수 있는 다른 대안들은 없었던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화가 더 빠르게 일어난 여성 노동자에게는 또 다른 심리적 육체 적 희생이 강요되었다. 여성노동자들이 결혼 후에도 공장생활을 계속 할 수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심한 노동강도와 초과근무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여성노동자들이 담당했던 일들이 그저 단순한 기술과 높은 노동규율 요구하는 작업이었기에 경영 자들은 상대적으로 임금이 많이 나가는 경력자 대신 새롭고 나이가 어리며 다루 기 쉬운 노동자로 대체하기를 바랬다.(구해근, 2002) 그리고 이러한 의도들은 1971 20) 송호근 . 1991 . 『한국의 노동정치와 시장』. 서울 : 나남 신광영 . 1994 . 『계급과 노동운동의 사회학』. 서울 : 나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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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부터 80년 사이에 매년 7.8%의 경제성장, 그리고 제조업 부문의 14.8% 성장과 같은 급속한 경제발전을 위하여 친자본적. 반노동적 태도를 취해온 강력한 국가에 의해 옹호되어 졌다.

2절

노동 공간 내부 1. 공장노동 : 거친 손과 강한 팔뚝, 여자군대

K씨 칠십 몇 년쯤 노동법인가 뭔가가

생기기 전에... 그러니까 8시간 3교대로

바뀌기 전까지의 공장 생활은 아마 상상도 못 할꺼야 ... 24시간 연장근 무라고 아나 ?

토요일 아침부터 일을 시작하면 일요일 오전이 되어서야

그만 두게 하는 거야 .. 그러면 일요일 오전이면 24시간 꼬박 밤새가며 일을 하고는 거의 죽어가는 얼굴로 돌아와서 쓰려져 자는 거지... 평소에 도 12시간씩의 기본 업무에다가

잔업까지 하던 것은 너무나도 다반사

였어 ... 그래도 어떻하겠어, 우리가 안 하면 회사가 망한다고 하는데..

1962년 1월에 발표된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하에 한국사회는 60년대 경 공업 중심의 수출 체계를 지향하였다. 노동 집약적이며 수출 주도적인 제조업을 육성하는 일로 시작된 산업화에서 이 분야 생산직 노동의 상당부분은 바로 이 나 이 어린 미혼 여성들이 담당하고 있었다.21) 대규모의 미혼여성들이 실을 뽑거나 옷감을 만드는 공장 등에 일자리를 구하게 되었지만 이들이 공장에서 발견한 노 동생활은 대단히 힘들고 비인간적인 것이었다. 한국의 제조업 노동시간은 극단적 으로 길었고 규제되지 않는 것이어서 1987년이 되기 전까지 주당 평균 노동시간 은 계속 증가하였다22). 특히나 피복 섬유와 같은 노동 집약적인 부문에 종사하던 21) 여성 중심의 제조업 분야는 1975년까지 총수출액의 70%를 담당했을 만큼 미혼 여성노 동은 1970년대 까지 한국 산업화의 중심 인구층을 구성하고 있었다.(김은실 ,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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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공장노동자들은 12시간 교대 근무나 주문날짜에 맞추기 위한 초과노동을 계 속 강요당하고 있었다. 이 같은 장시간의 노동을 하게 만드는 가장 주요한 요인은 그들에게 할당되는 잔업 때문이었다. 김형기의 연구(1988)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여성 공장노동자들 이 정상 근무로 받게 되는 기본급만으로는 생활을 꾸려나가기가 힘들었기에, 임금 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잔업은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23). 하지만 대개의 잔업은 자 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노동자들의 개인적인 조건과는 무관하게 회사가 필 요로 할 때를 기준으로 하여 정해졌다. 계획성 없는 경영자들은 회사운영을 핑계로 감원은 시켜 놓고는 주문이 쇄도 할때는 노동자의 부담은 생각지도 않고 일단 받아놓았기 때문에, 변칙적인 근무 시간의 조정이나 휴일의 반납은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다. 또한 이들은 공장의 여 성노동자들을 저임금의 노동집약적 수출산업에서 가장 요구되는 노동력의 유형인 순종적이며 부지런하고 끈기있는 노동력으로 만들기 위해 가족적 가치관에 호소 해서 노동자들의 복종을 얻어내고자 했다. 적은 임금으로 생활해야 하는 여성노동자들에게 어느 정도까지의 잔업은 수입 을 늘리기 위한 방편이었지만 이들이 해야했던 잔업은 단지 한 두시간 정도 더 일하는 것이 아니라 밤을 새고 꼬박 24시간을 계속해서 일해야 하는 것을 의미했 다. 이러한 작업 조건 속에서 졸음을 견뎌내기 위해 여성 노동자들은 ‘타이밍’과 같은 각성제를 수시로 복용하는 것이 흔한 일이었고 노동자들의 건강상태는 급속 도로 나빠져 갔다. 잦은 밤샘 작업과 휴일없는 생활의 반복으로 공장노동은 너무 나 큰 육체적 고통과 신체의 훼손을 가져왔지만 공장의 노동환경은 노동력 재생 산에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조차 보장하지를 못했다.

G씨 일하는 곳이 방적회사에서 실을 뽑는 것이었는데 먼지도 많고 정말 더운 22) 1970년 제조업 주당 평균 노동시간은 52,5 시간이었는데 1980년에는 53.1시간으로 1986 년에는 54.5 시간으로 늘어났다. (구해근 , 2002) 23) 1970년대와 1980년대 중반까지 제조업 육체 노동자들은 임금의 1/5 정도를 잔업으로 벌어들인 것으로 나타났다. ( 김형기. 1988. 『한국의 독점자본과 임노동 : 예속독점 자 본주의하 임노동의 이론과 현상분석 』. 서울 : 까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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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이었어요 여름에는 열대지방에 있는 것 같이 땀이 줄줄줄줄 등을 타 고 흘러내리고... 실 말은 것 같은 걸 옮기려면 어깨도 정말 아프고 ... 그래도 남자직원은 없고 다 우리 여자들이 해야하는 일이었으니까...아 마 남자가 하기에도 힘들걸 .. 팔힘도 좋아야 하고 팔뚝도 굵어야 하고 (웃음) 그래야 악으로라도 힘이나 쓰지요.

근대화 프로젝트 과정에서 작업장의 배치가 성별 영역 지정의 형태로 나타났 다고는 하지만, 이들 여성공장노동자가 실제 공장에서 해야 했던 일의 성질은 전 혀 ‘여성적’인 형태의 작업이 아니었다. 남자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남자의 역 할’까지도 해야하는, 스스로도 “이건 남자도 못할 일이야”라고 인식할 정도로 육체 적 노동강도가 센 일들을 그녀들은 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지 노동시간이 ‘길다’라 는 차원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녀들이 공장에서 해야 했던 일들은 강한 팔뚝, 굳은 살로 울퉁불퉁해진 손바닥, 그리고 먼지로 거칠어져 버린 손등을 필요로 하는 것 이었다. 게다가 당시 대부분의 공장들은 기준치가 넘는 소음 먼지 열 등을 발행하 여 직업병을 초래하고 있었고, 높은 산업재해율로 여성 노동자들은 상시적인 위험 에 노출되어 있어24) 그녀들의 몸은 더욱 더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었다. 대부분의 여성공장노동자들이 10대 후반-20대 초반인 것을 감안해 볼 때, 가장 건강이 좋아야 할 연령기에 있었던 이 여성들이 청각장애 , 시력감퇴 , 피부질환 , 소화불량 등의 건강문제로 고통받고 있었다는 것25)은 당시의 위험한 작업환경에 서 해야 하는 강도 높은 육체노동이 여성노동자들의 몸을 얼마나 급격히 망가뜨 리고 있었던가에 대한 반증이 될 수 있다. 1960,70년대의 여성공장노동자들은 저임 금의 노동집약적 산업부문의 열악한 작업 조건 속에서 그들의 젊음을 소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24) 예를 들어 1976년 당시의 한국의 산업재해율은 미국과 영국 산업재해율의 5배였고, 일 본 산업재해율의 15배 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여성유권자연맹, 1980: 58) 25) 1977년 한국노총이 실시한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조사에서(구해근, 2002: 91에서 재인용) 현재의 주된 걱정거리에 관해 응답자의 35%가 건강과 관련된 문제라고 응답하고 있다. 이는 여성노동자들이 가장 걱정할 만큼 심각한 것이 건강임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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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씨

20수 하면 아주 굵은 거고... 한 60수 이렇게 되면 정말 가는 실이 ... 눈에도 잘 안 보이는 실이 정신 없이 쏟아지거든 ... 그게 조금만 정신 안 차리면 기계에 다 엉겨 버리니까 정신이 없지 ...기계에 한 번 엉기면 기계를 다 멈추고는 다 뜯어가지고 조립을 다시 다 해야 하거든요...또 기계 같은 거에 스치면 많이들 다치고 하니까 보호대 같은 걸로 다 덧대 야 하고 ... 작업장엔 조장 부반장 반장 이렇게 있고 ...그 아래에 200명 정도가 반 장 한명의 지휘를 받는 거니까... 반장 지휘에 맞춰서 일사분란하게 움직 여야지 기계가 착! 착! 돌아가거든 .. 뭐 여자 군대 같은 거지...

J씨

라인에도 좀더 힘들고 안 힘든데가 있거든요 ... 전방 후방 이렇게 불렀 는데 좀 편한 후방이라도 갈려면 무슨 빽이라도 있어야지 ... 아무나 못 가요.. 그저 우리처럼 빽없는 애들은 전방에서 실이나 뽑고 있어야지..뭐... 솜에서 실 뽑는 게 제일 힘든 일이었거든요

거칠고 힘든 일의 통제는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남자들의 군대조직을 모방한 듯한 ‘조원-조장-부반장-반장..’식의 질서 속에서, 조장이 되는 순간부터 팔에는 ‘조장’이라고 굵게 쓰여진 완장이 채워지고 이름대신 조장‘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리 어졌다. 산업화 이전에서 산업화 이후로의 노동환경의 전환을 위해 작업장의 규율 체계가 생겨난 것이다. 톰슨(E. P. Thompson)이 말한 것처럼 " 노동환경의 전환을 위해서는 새로운 규율,

새로운 동기부여 , 이러한 동기부여가 효과적으로 먹혀 들어가는 새로운 인

간성격 등을 포함하는 작업습관의 근본적인 재구성이 필요“26)했다. 한국의 남성들 에게 주어진 군대복무의 경험이 엄격하게 통제된 조직생활에 익숙해지도록 사회 화 교육을 효과적으로 시켜 통제되고 위계적인 산업조직에 쉽게 익숙해지게 만들 었던 것처럼, 여성공장노동자들의 거칠고 힘든 작업내용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26) Thompson, E. P. 1967. "Time, Work-Discipline, and Industrial Capitalism." Past and Present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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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한 방식으로 군대의 체제는 모델이 되어 주었다. 시간에 맞추어서 하는 작업들, 상사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받게 되는 처벌 , 권위주위, 폭력 등이 그들의 일상 이 되었다. 공장의 공간을 설명하는 단어에도 ‘전방’

‘후방’과 같은 단어들이 사용되고 여

기에 배치되는 인원도 군대에서의 인력배치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장-부 반장-반장...’의 체계 속에서 대규모의 인원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했고, 같은 여성공장노동자들 사이에서 모범적인 근무태도- 회사의 요구이상으로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태도 -로 인하여 뽑혀졌던 조장이나 반장 같은 이른바 ‘간부’직들은 명 예의 대상이기도 하였지만 여성노동자들이 여성노동자 스스로를 관리하게 만드는 일종의 자율감시체계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일단 조장이나 반장이 되는 순간부터 그녀들은 더 이상 ‘일반 여성노동자’ 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들은 회사의 남성간 부나 관리자가 없는 상황에서 그들을 대신하여 다른 여성공장노동자들을 관리, 훈 육하는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각 조/반의 생산성을 최대한으로 높이기 위해 피곤에 지쳐 기계 사이에 몰래 숨어서 자는 동료들을 깨우고 일에 집중하지 않고 딴전을 피우는 이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였다. 여성노동자들 사이에 이처럼 비인 간적이고 위계적인 규율체계가 생겨남으로써 공장의 거대한 기계는 쉴 틈 없이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H씨 내가 한일이 광목 짜는 공정.. 마지막 부분에서 돌아가는 천의 통을 들여 다 보다가 잘못된 올을 발견하면 발판을 눌러 가지고 통을 멈추게 하는 거였거든요.. 들고 있는 족집게로 잘못된 올도 뽑아내고 참빗으로 싹싹 쓸어내기도 하고 그런 일이었는데 ... 첫날에 일하면서 옆에 있는 사람한테 이름이 뭐냐 고향은 어디냐 나이는 몇 살이냐 ... 이런 걸 물어봤어요 그런데 갑자기 위에서 여자반장이 호루 라기를 삐익! 하고 불어대는 거야 .. 내가 어리둥절해서 있으니까

나더러

일하면서 말이 많다고 야단을 치는 거야... 그때는 도망을 가고만 싶더라 구 .. 대꾸 한마디 못하고 ... 그래서 오후에는 입 꽉 다물고는 묵묵히 일만 하고 있는데 또 그 끔찍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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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루라기 소리가 나는 거야.. 그러더니 여자반장이 또 나를 째려보며 다 가와서는 나를 막 흔들어 대는 거에요 ...

정말 이유를 몰라서 왜 그러냐

구 그랬더니... 알고 보니까 나더러 근무 태도가 나쁘다는 거에요.. 딴 사람들은 하루종일 똑바로 서서 부동자세로 일을 하는데 나만 삐딱하 게 서서 통이 돌아가는 선반에다가 기댔다는 거지... 너무 힘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선반에 기댄 것 가지고 그렇게 사람을 모욕을 줘야 하나 눈 물이 주르르 흐르더라고..

여성공장노동자들에 대한 통제는 비단 업무 내용과 노동시간에 한정되어 이루 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공장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여성 공장노동자들은 그들이 작 업장의 선반 앞에 서있는 방식 , 동료들과 말하는 방법, 하복과 동복을 입어야 될 순간, 심지어 머리모양 까지 아주 세세하게 통제 당해졌다. 군가와 같이 들리는 사 가에 맞추어 시작된 아침조회에서는 오늘 하루의 생산 목표량뿐만 아니라 여성 공장노동자들의 개인적인 공간이나 몸에 대한 세세한 규율까지도 반복되어 읊어 졌다. 공장 안은 기계의 굉음으로 가득 차 버렸고, 일하면서 서로가 주고받는 부드러 운 대화 같은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공장노동자들의 목소리는 커져만 가고 목소리도 자연히 걸걸해졌다. 무슨 다급한 일이 생기면 아무리 소리쳐 불러도 제 대로 들리질 않아 호루라기를 불어 신호를 보내야만 했다. 1960,70년대의 여성 공 장노동자에게 의사소통은 호루라기의 짧은 신호와 긴 신호의 조합, 자세는 ‘반장언 니’가 정해준 표본대로 부동자세로, 시선은 언제나 앞의 기계에만 고정 . 그녀들의 몸에서 인간의 살내음은 사라져 갔다.

2.

I씨

회색작업복 : ‘여자’가 아닌 여자

우리 아버지는 원래 강원도 영월에서 주인없는 땅을 개간하는 화전민이 었는데 .... 한창 그때 잘나가던 광산에서 일하신다고 강원도 정선 사북으 로 이사를 했지요... 탄광에서 받는 월급으로도 잘 안되니까 우리 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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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돌아가며 친척집에서 얹혀 살기도 하고....난 국민(초등)학교를 졸업 하고 탄광에서 채석된 탄을 골라내는 일을 곧바로 시작했어요 ...근데 탄 광에서 일하는 게 너무 싫은 거야... 그래서 17살 때 서울로 돈 벌러 가 기로 결심했어요 ...어차피 우리 아버지도 나를 학교에 보내지 않을 생각 은 아예 없던 분이었으니까 ... 근데 지금도 기억나는 게 서울로 가면서 읍내 양장점에서 오렌지 색에 까만 땡땡이 블라우스 맞춰 입고 가던거, 쇼윈도우의 양장옷들이 참 좋아 보이더라구... 17살 가을 때 청량리 역에 도착해서 뭐가 뭔지도 모르고, 아 남동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지요.

도시로 갓 올라온 이들에게 도시는 아름다운 옷을 입은 예쁜 아가씨들이 활보 하는 곳이었다. 마음껏 입어보고 싶은 옷들을 입어보리라 양장점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옷들마다 점을 찍고 다니며,

아직 받지도 않은 월급을 이리저리 가늠해

보았지만, 공장에 들어서는 순간 그녀의 오렌지색 땡땡이 블라우스는 고이 접어 모셔두어야 했다.

S씨 회색 작업복으로 똑같이 맞춰서 입었지...약간 뻣뻣하고 무릎이랑 기계 닿는 부분에는 다치지 말라고 몇 겹 더 대어져 있고 폼새는 없었겠지... 글쎄 뭐 굳이 설명하자면 죄수복 같은 차림이었다고 하면 되나... 머리수 건으로 머리카락은 꽁꽁 동여매야 하고 ... 행여라도 실에 머리카락이 섞 여 들어가면 안되니까... 공장안에선 똑같이 몇 백명이 그렇게 입으니까 굳이 뭐 챙피하다고 여길 것은 없었지만 좀

그랬지... 색깔도 그게 뭐

제일 때 안타는 거였으니까 그렇게 만들었겠지..

회색빛 작업복을 입고 수 백 명의 여성들이 기계 앞에 줄지어 서있었다. 애써 서 길게 기른 검은 머리카락은 수건 뒤로 꼭꼭 싸 매여진 채 숨겨져 있었고,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휙휙 다리를 감아 내려오다 멋지게 펼쳐지는 나팔바 지 대신, 몇 겹이고 덧 대여진 폭 넓은 일자바지와 가슴에 두 쪽 주머니가 모양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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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린 몸의 선은 결코 드러나지 않는 저고리가 입혀졌다. 그리고 공장 안에서 풀풀 날리던 먼지는 흐르는 땀과 뒤엉겨 땟국물처럼 얼굴엔 얼룩이 지고

피곤에

지쳐 힘이 빠진 손은 금세 상처투성이로 변해 갔다. 여성공장노동자들은 공장노동자들이 겪어야 했던 일반적인 지위하락뿐만 아니 라 여성성(feminity)에 대한 공격까지도 받아야 했다. 흔히 사람들에 의해서 말하 여 지던 “ 여자는 행동을 조신하게 하고 .. 여자 목소리는 담을 넘어서는 안되고 ..” 와 같은 ‘ 여자는...’의 담론에 공장노동은 도무지 부합될 수가 없었다. 웅웅거리 는 기계소리에 맞서 커져 버린 목소리에 눈코 뜰 새 없이 기계 사이를 분주하게 다녀야만 했던 여성 공장노동자에게, 그러한 ‘여성다움’을 유지한다는 것은 일을 그만두겠다는 결심이 없고서는 사실 불가능한 일었다. 더구나 공장이라는 공간은 수백 명의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여성 공장노동자의 작은 실수에도 거친 욕설과 고함이 오고가는 곳이었으며 관리자들의 입에 배인 상소리와 언어적 모욕은 여성 공장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일상적인 언어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여성성’에 대한 공격들은 그들이 일하고 있는 공장이 여성성을 파괴하 는 공간이라는 공포를 가지게 했다. 결국 육체노동에 대해 행해지던 일반적인 폄 하가 여성 공장노동자에게는 성적인 차별로까지 이어져, 공장의 거친 환경에서 육 체노동을 한다는 것이 어떤 여성적인 덕목을 상실하게 되는 행위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C씨 글쎄 ... 그 아이들이 여자처럼 보이진 않았어.. 걔 중에 얼굴 반반한 얘 들도 좀 있긴 했지만 ..아휴 , 걔들이 얼마나 거친 애들이었는데..막 돼 먹었다고 해야 하나..좀 그런 애들이었어 ...일하는 거 보면 남자가



로 없어 ...또 목소리는 얼마나 큰지 .. 난 고향이 충청도라 목소리 큰건 딱 질색인데 ...부산근처에 있는 공장에서 일하는데 무슨 돼지 멱을 따는 지...아휴! L씨 같이 일하던 반장 중에 성격이 아주 와일드한 애가 하나 있었든데... 이 건 이름만 여자지 완전 남자야 ... 같이 일하는 애들을 완전히 휘어잡고 통솔하는데 .. 나같은 기사가 그런 애들하고 문제가 생기면 나중에 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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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어 지니까 함부론 못하지만 뒤에서 우리들끼리(기사들끼리) 그랬 지... 진짜 여자인지 누가 한번 확인해봐야 한다고 (웃음) 서로 니가 하라고... 뭐 여자가 좀 야들야들한 게 있어야지 여자지, 아무나 다 여잔가... 일하는 거 보면 불쌍은 하지만... 그게 좀 고생이야 , 그냥 다 불쌍한 동생 들 같지.

이처럼 여성공장노동자를 멸시하는 태도는 관리자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 니라 동료 남성공장노동자에게서도 나타나고 있었다. 당시 같은 공장에서 기계를 손보는 기사로 일하던 C씨는 여공들이 수 백명이나 같이 있었지만 공장에서 일하 는 동안 그들이 ‘여성’으로 느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말한다. Z씨는 자신이 담당한 기계를 움직이게 만들어 주는 일종의 기계 부속품과 같은 느낌으로 그들 을 바라보면서, 가끔은 동료기사들과 휴게실에서 그들의 ‘거칠음’과 ‘매력없음’을 비웃기까지 했다. 동료 남성 공장노동자들은 일반 중간계층 여성들에게는 행하지 않았을 언어 적인 폭력을 당연스럽게 행하고 있었으며, 여성공장노동자에 대해서 동료애를 느 끼기보다는 그들을 비하함으로서 뿌리 깊은 편견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것은 폴 윌리스가 그의 연구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Paul Willis, 1977), 남성 공장노동자 들은 자신의 노동을 남성우위 이데올로기로 미화시킴으로써 허구적인 우월감을 가질 수 있는 반면 , 여성공장노동자들의 노동에 대해서는 이중적인 잣대로 비하 시킴으로써 남성우월주의의 희생물로 만들고 있었다. 이러한 성차별과 특정계급 여성에 대한 이중적인 잣대는 노동계급 문화의 보편적인 특성으로 나타나고 있으 며27), 한국에서 여성공장노동자들을

‘천한 노동자’라는 신분적인 경멸 외에도 ‘여

자 같지 않은 여자’라는 이중적인 억압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동료 남성공장노동자들이 모두 이런 조롱만을 일삼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 대다수는 사실 감정적인 차원에서 여성공장노동자들에게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들의 동생이나 누나를 보는 심정으로 아파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27)

Willis, Paul . 1977. Learning to Labor Working-Class Jobs. Wsetmead : Saxon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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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w

Working-Class

Kids

Get

한 동정의 근원은 바로 여성 공장노동자가 행하고 있는 일이 ‘여자가 하기에 적절 치 못한 일’이라는 판단에서 근거하고 있었다.

(...)2만 여명을 넘는 종업원의 90%이상이 평균연령 18세의 여성입니다. 기준법이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으로써 어떻게 여자에게 하루 15시간의 작업을 강요합니까? 미싱사의 노동이라면 모든 노동 중에서 제일 힘든(정 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노동으로 여성들은 견뎌내지 못합니다. 또한 2만 여명 중 40%를 차지하는 시다공들은 평균연령 15세의 어린이들로써(...)하 루에 90원 내지 100원의 급료를 받으며 하루 16시간의 작업을 합니다. 사 회는 이 착하고 깨끗한 동심에게 너무나 모질고 메마른 면만을 보입니 다(...)저 착하디 착하고 깨끗한 동심들을 좀더 상하기 전에 보호하십시오. 근로기준법에선 동심들의 보호를 성문화하였지만 왜 지키지를 못합니까? (...) 저는 피끓는 청년으로써 이런 현실에 종사하는 재단사로써 도저히 참혹한 현실을 정신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 15세의 어린 시다공 들은 일주 98시간의 고된 작업에 시달립니다. 평균 20세의 숙련 여공들은 6년 전후의 경력자로써 대부분이 햇빛을 보지 못한 안질과 신경통, 신경 성 위장병 환자입니다. 호흡기관 장애로 또는 폐결핵으로 많은 숙련 여공 들은 생활의 보람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하루 속히 신체적으로 정신 적으로 약한 여공들을 보호하십시오. 최소한 당사들의 건강에 영향을 끼 치지 않는 정도로 만족할 순진한 동심들입니다. 각하께선 국부이십니다. 곧 저희들의 아버님이십니다. 소자된 도리로써 아픈 곳을 알려 드립니다. 소자의 아픈 곳을 고쳐 주십시오.

“전태일이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중 발췌

공장은 여성 공장 노동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이전의 “깨끗한 동심들”을 상하게 만드는 곳이었다. 그리고 여성 공장노동자들이 지켜야 할 “동심들” 이 망가져 가 는 것을 공장의 한 켠에서 동료 남성 노동자들은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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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들은 여성공장노동자들을 순수함, 깨끗함 또는 동심으로 지향하여 바라보며 남자가 보호해 주어야 하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공장에서의 생활을 방치하는 것은, ‘망가져 가는’ 여성노동자들의 무엇인가를 지켜주어 할 ‘아버지’나 ‘오빠’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나라의 ‘아버지’인 대통령에게 이들에 대한 구제를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 공장노동자들에게 ‘아버지’나 ‘오빠’의 역할이 제대로 작용되어야 한다라고 믿 는 것은 여성 공장노동자들을 끓임없는 남성 주체에 의한 보호의 대상으로 바라 보고 있음과 동시에, 공장노동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은 그러한 보호로부터 일시적 으로 ‘방치’되고 있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1970년말의 초기 노동운동 단계에서 여성노동자들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는 교회집단이나 지식인들 들도 젊은 여성공장 노동자들을 가장 연약하고 피해받기 쉬우며 그래서 보호받아 야 하는 사람으로 규정하는 온정주의적 태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28). 이것은 당시의 산업선교나 노조활동가들이 가장 착취당하고 가장 나약한 노동자들부터 대상으로 활동을 하였던 것으로 당연시 될 수도 있지만 , 이들이 ‘어린 여성’노동 자에게 부여했던 ‘낭만적인 동정’ 과 전혀 무관하다고는 볼 수 없다. 이렇게 정상적인 여성의 일에서 벗어나 비정상적인 상태로 노동하고 있다는 주위의 동정어린 시선들은 그들이 감내하고 있던 현실의 노동조건과 맞물려 여성 공장노동자들에게 더욱더 자신의 일에 대한 자신감을 잃게 만들었으며 자신이 가 지고 있는 정체성에 대하여 회의를 품게 만들었다. 공장에서 만나게 되는 남성 동료들과의 관계에서 여성 공장노동자들은 자신의 여성성 (feminity)에 대한 자신감을 잃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평가할 때 그저 ‘선머슴애’ 같은 존재였다고 평가하였으며, 자신이 여성으로서 남자들의 시선을 끌 만한 ‘자격’은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일하고 있던 공장 안에서도 이미 ‘여성다움’에 대한 위계는 설정되어 있었다.

28)

1970년대의 활동을 모은 책에서 조화순은 여성공장노동자들은 “ 가장 소외되고 억압 받은 사람들이다” 라고 언급하고 있다. ( Cho, Wha Soon, 1988 . let the Weak Be Strong : A Woman's Struggle for Justice. Bloomington, Ind : Meyer Stone & 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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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씨

우리 공장에도 괜찮은 곳이 있긴 했는데... 실험실 안에서 대학생 실습생 들이랑 같이 품질 검사하는 실험실... 거기는 고등학교도 나오고 한 얘들 이었을꺼에요.. 그람수 재고 계산하고 그런 거하고 .. 거기에는 옷도 우리 거랑은 좀 틀리고 그랬어요...가끔 잘생긴 대학생들 오고 그러면 뭐 우리 쪽은 한 번 쳐다보기나 하나 뭐 말 한마디 못하는 걸 ...개들은 같이 이야 기하고 웃고 그러면 부럽기도 하고 그렇지.. 가끔 우리들 사이에서도 인 기있는 남자들이 있고 그랬거든요.. 경리보는 사람도 괜찮았구요. 우리 공장에도 한둘 정도 있었는데... 예쁘고 깨끗하고... 부럽죠 ... 하지만 그건 뭐 내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커다란 기계 앞이 아닌 사무실에 들어가 있는 것, 땀내가 절어있는 옷이 아닌 깨끗한 옷을 입는 것, 시끄럽고 거친 목소리가 아닌 낮은 목소리로 서로의 이야기 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들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렇게 단정하고 말끔한 용모로 조신하게 움직일 수 있는 사무직여성의 일은 -설 사 그것이 남성들의 일을 보조하는 극히 수동적인 노동형태임에도 불구하고 그러 한 평가와는 전혀 상관없이- ‘여성다움’을 최대화 할 수 있는 일이었고,

그러한

형태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남자들에게 시선을 받아도 부끄럽지 않고 ‘선머슴 아’ 같다고 조롱받을 필요도 없는 바람직한 것이란 생각이 그들에게 체험적으로 형성되었다. ‘자신이 바라는 것’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사이의 뚜렷한 차이는 여성공장노 동자들에게 강한 ‘이탈’(Albert Hirshman, 1997)의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공장노동 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자신의 생애에 일시적인 단계일 뿐이라고 생각29)하 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무직 노동자가 되고 싶다는 바램은 그들 대부

분이 이 가지고 있던 낮은 학력으로는 도무지 이루어지기 힘든 것이었다. 어떤 이 들은 사설 학원이나 야간학교에 다니며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학력을 높이려는 적극적인 시도를 해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성공적인 이탈’은 이루어 질 수 29)

Hirshman, Albert. 1971. Exit, voice, and Loyalty : Response to Decline in Firms, Organizations, and States . Cambridge, Mass. : Harva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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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없었다. 공장노동자들은 사회적으로 경시받는 주된 원인이 사회변화에도 불구하고 신 분의 가장 핵심적인 잣대로 남아 있는 교육의 상징성이라고 생각했다. 교육은 심 한 부침을 겪어온 한국사회에서 가장 신뢰할만한 신분상승의 수단이었으며 큰 도 덕적 위엄까지 지니고 있었다. 여성공장노동자들은 “배우지를 못해서”라는 제한적 인 진술을 통해 자신에 대한 어느 정도의 불공평한 대우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결 국 자신의 노동과 노동공간을 여성으로서 ‘바람직하다고 평가받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교육’이라는 자원이 우선적으로 확보되어야만 했지만, 최저의 생활비조 차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했던 저임금 노동집약적 산업의 여성노동자들에게는 어 려운 일이었다.

자신이 일하는 모습이 스스로를 주눅들게 만들고 , 또 자신이 공

장에서 ‘여성스럽지’ 못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같은 공간에서 일을 하고 있는 동료들에게조차도 ‘좋은 여자’라는 평가를 받는데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여성 공장노동자들은 하나 둘 공장을 떠난 다른 곳의 삶을 꿈꾸기 시작한다.

M씨 그때 난 힘든 공장일이 너무 힘들어서 지쳐 있었거요 ... 공장일이 좀 그 렇잖아 .. 별로 이쁜 일도 아니고, 남한테 말하기 좋은 일도 아니고 ... 경리사원이 너무 부러워서 그게 꼭 되고 싶었는데 ...어디서 고등학교 다닌 것보다 한문 , 부기학원을 다니면 경리 사원으로 더 빨리 들어 갈 수 있다는 말을 들어서 학원도 다녀봤죠...그래도 중졸인 나를 경리사원 으로 잘 안 받아주더라고 ... 그래서 결국 나중에는 돈을 모으고 기술을 익혀서 미용실 기술자로 가게 되면서 공장을 나가게 되었어요.. 그래도 그나마 그게 나을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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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노동 공간 외부 1. ‘여공’의 자리

1960년대 이후 농촌에서 대규모로 충원되었던 여공들은 사실 신분상승의 강한 열망을 품고 떠나온 사람들이었다. 그녀들이 감행했던 ‘서울로의 탈출’은 어린 동 생들과 무능력한 부모들의 생계해결을 위한 일종의 구원이기도 했지만, 젊고 감수 성이 강한 어린 소녀들에게 낯선 도시로 떠난다는 것은 자신의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감으로 부풀게 만드는 것이었다. 시골에서 갓 올라온 신출내기 노동자들은 수 출제조업 산업으로 고용되어 새로운 노동환경에 적응하면서 노동의 어려움을 어 느 정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감내하였다.

그것은 지금의 고난을 극복하고 나면

한결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들 을 기다리고 있는 더 나은 삶이란 없었다. 70년대에 구전되었던 노래였던 ‘영자송’30)은 딸이며 동생인 영자를 향해 자신 의 절망스런 현실을 토해내던 노래였다. 이 노래에서 댓구법으로 표현된 사장님청소부, 장교-군바리, 여대생-공순이의 극적인 대조는 그저 잘 나가는 것으로만 알고 있던 근대화 조국의 영광이 소수에게만 집중된 것이라는 사실을 하나 둘 알 아차리고 있음을 자조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특히 영자송의 “서울에 있는 이 언 니는 여대생이 아니라서 청계천 하고도 지하공장에서 뺑이치는 공순이란다” 라는 구절처럼 여대생과 ‘공순이’ 사이의 엄청난 거리는 그 하나는 여성이 달해야 할 하 나의 지표로서 또 하나는 ‘망쳐진’ 현실로서 나타나고 있었으며, 여성잡지에서는 30) 영자야 내 딸년아 / 몸 성히 성히 성히 성히 성히 자알 있느냐? /서울에 있는 이 아빠 는 사장님이 아니란다 /(니미씨팔 가정환경조또)/서울에 있는 이 아빠는 사장님이 아니 라서 /광화문 하고도 한복판에서 싹싹닦는 청소부란다. /(니미씨팔 가정환경 조또) // 영 자야 내 동생아/ 몸 성히 성히 성히 성히 성히 자알 있느냐? /군대에 있는 이 오빠는 장교가 아니란다./(니미씨팔 가정환경 조또)/군대에 있는 이 오빠는 장교가 아니라서/38 선 하고도 철책선에서 빡빡기는 군바리란다./(니미씨팔 가정환경 조또) // 영자야 내 동 생아/ 몸 성히 성히 성히 성히 자알 있느냐?/서울에 있는 이 언니는 여대생이 아니란 다./(니미씨팔 가정환경 조또)/서울에 있는 이 언니는 여대생이 아니라서 /청계천 하고도 지하공장에서 뺑이치는 공순이란다./(니미씨팔 가정환경 조또) <‘영자송’ 가사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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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대생에 관한 기사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31).

(...) 구름다리에서 인생의 최고미를 형성하고 있는 생활인상- 이것이 바 로 여대생들의 생활이 아닌가 싶다. 여대생의 미는 남녀간의 사랑-애정만 을 의미 하는 것이 분명 아니다. 최고로 아름다운 것은 모든 형태와 질서 도 무시하며 초월하는 미라고 볼 때 형태와 질서를 무시하는 사랑은 곧 지성을 가진 미의 발산이다(...)이 대학생의 고귀하고 신선한 창가에서 자 연의 꿈을 엮는 요리사가 되는 것도 여대생 시절의 특권이며 권리고 또 한 행할 수 있는 힘-요소와 환경을 가졌다는 것이다. (...) 이미 세상에 태 어나면서부터 다른 여성들과는 다른 신의 부름을 받은 여인들이다. 그러 기에 여성들 -모든 여인들 가운데 특권적인 위치에 서서 있는 것이 또한 여대생들이다 (...) 얌체라는 말소리가 귓가를 스쳐도 의젓하게 버스의 뒷 문을 오르고 있는 표정의 미도 여대생의 특권행사의 하나며 , 그 미적 행 위도 아무도 나무라지 못하는 통학길의 미소중의 미소 (...)

김 해성(시인). ‘여대생의 미적 사랑’ <신여상 70년 4월호> 중 발췌

모두가 배우지 못하던 시절을 지나 이제 누군가는 배울 수 있게 되었다. 가족 이 가지고 있는 경제적, 문화적 자원에 때라

“이미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여성들과는 다른” 특권적인 위치로서, “신의 부름을 받은” 여성의 ‘미’를 대표하는 표상으로 떠오르게 된 여대생 집단과의 곤혹스러운 비교는 ‘여공’의 자리를 더욱더 볼품없게 만들었다. 여공들은 가난해서 배우지 못했고, 그래서 무식하며, 그 결과 자신은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이 그녀들이 발견한 결론이었다. 이러한 위계에 맞서 자신의 긍정적인 정체성을 형성시킬 만한 언어들을 한국 의 여성공장 노동자들은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유럽에서는 길드나 장인 문화의 31)신여상 1970년 6월호의 목차만 살펴 보아도 39개의 기사중에서 12개의 기사가 ‘여대생’ 에 대한 직접적인 기사로 이루어졌으며 , 이중 가장 비중있는 특집기사는 “ 여대생 지금 당신은 무엇을” 이라는 주제로 30페이지에 달하는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또한 여대생 의 기고글은 ‘여대생의 발언’이라는 중요한 섹터로 분류하여 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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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이 장인직업의 독립성 , 장인정신에 입각한 노동, 직업공동체로부터의 친밀한 네트워크와 공동체적 정서들이 물질적 사회적 자원들을 얻어낼 수가 있었지만 , 전통적인 한국의 유교신분체계에서 농민보다 더 낮은 신분으로 신분질서의 가장 낮은 층에 속해 있던 장인들은 집단적으로 강력하게 대응할만한 강한 장인문화의 전통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실제로 많은 장인들은 노예신분에 속한 상태였고(송 찬식, 1973), ‘공돌이 공순이’라는 말 안에는 육체노동을 하는 머슴, 하녀와도 같은 열등한 노예신분의 이미지가 들어 있었다.. 이는 자영농 이외의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전통적으로 부여된 경멸적인 신분이었으며 육체적 노동에 대한 부정 적 평가를 담고 있었다. 여성공장노동자들은 낮은 신분 낮은 소득으로 인하여 너 무나 쉽게 ‘무식한 년’이라고 불리어졌다. 여성공장노동자들이 겪어야 했던 초기 산업화시기의 극심한 사회정치적 변화 는 그들에게 놀라운 적응력과 유연성을 강요한 것이었고, 수출제조업부문으로 충 원된 여성공장노동자들은 사실 순발력과 근면한 습관까지 갖춘 훌륭한 산업인력 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성공장노동자들이 산업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 당하고 있음을 인정은 하면서도 여전히 매우 경멸적인 시선으로 이들을 바라보았 다. 그러한 시선 속에서 공동체 문화도, 장인적 자긍심도, 어떠한 집합체적 규범도 없이, 긍정적인 자아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한 문화적 제도적 기반도 없이, 원자화 되고 뿌리 뽑혀져 각개 전투식의 삶을 살아야 했던 여성공장노동자들은 ‘미의 표 상’은 사회적으로 주어졌으나 자신은 그렇게 될 수는 없다는 박탈감을 강화시켜 나가고 있었다. 이런 여성공장노동자에게 긍정적 이미지의 언어를 만들어주려는 시도를 한것 은 국가였다. 국가는 1960년대 말부터 노동자들의 부지런함과 희생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이들의 노동을 애국적인 행위로 칭송하며 수출촉진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 하는 공장노동자들을 산업전사, 수출의 기수, 산업역군 과 같은 새로운 단더들로 호명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산업전사라는 명칭은 정부와 언론뿐만 아니라 노동

자들 스스로도-이후 노동쟁의의 호소문에 이르기까지- 자주 사용하게 된 용어들 이었다. 하지만 조국근대화라는 국가적인 목표를 위하여 동원된 이러한 민족주의 적이고 가족주의적 발전주의적인 수사들은 공장노동자들이 일상적인 노동생활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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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로 받는 대접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국가에 의해서 제공된 타의적 정체성으로서의 산업전사라는 허황된 이미지와는 달리 여성 공장노동자는 1980년 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미천하고 경멸할만한 대상으로 여겨졌으며 ‘공순 이’라는 냉소적인 언어로 불리어졌다. 이런 사회적인 태도는 일상언어와 대중매체 에서 표현되는 여성공장노동자들에 대한 이미지에서 계속적으로 드러났으며 , 공 장에서 일하는 여공들에게 되도록 빨리 비참한 공장세계에서 벗어나 공장노동자 라는 창피한 신분을 벗고자 하는 열망을 부추기고 있었다.

2. ‘정상적’ 여성과 ‘공순이’사이의 거리

K씨

난 국민(초등)학교를 마치고는 집을 나와서 부산에 있는 아는 집에서 엊혀서 살았어 ... 아주머니가 양품점을 하던 분이어서 많이 바쁘셨거 든... 일단 눈에 들어야 하니까 보이는 대로 일도 많이 해주고 그랬지 ... 그집의 식모가 된건지... 어떻게든 빨리 신임을 받아야 잠자리라도 보 장이 되는 거니까... 부엌일 ,집안청소 아기보기 점원노릇까지 내가 자청해서 했어 ... 그러다가 그곳 양품점에 자주 오는 방직공장 사람들 을 알게 되었거든 ... 그때 만난 반장 언니가 도와 줘서 방직공장으로 들어가게 된거지... 그것도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 양품점에 오는 공장언니들이 척척 옷도 해 입고 그러니까 되게 부럽 더라구.. 저렇게 공장에 다니면 옷도 해 입을수도 있고 동생들도 해주고 그럴 수 있구나 싶어서 그 언니한테 나도 들어가게 해달라고 졸랐지

근대화가 진행되던 60년대는 <미워도 다시 한번>의 여주인공 같은 미혼 여성 노동자들이 대거 도시로 이주하던 시기였다. 일단 도시로 이주하면 이러한 여성들 은 ‘여공’으로서 경공업에서 값싼 노동을 제공하거나 , 아니면 가사보조로 일했다. 봄이 되면 무작정 상경하는 여성들이 자꾸만 늘어났고 그런 여성들을 대상으로 역전에서는 귀가조치 하거나 친척을 찾아주거나 취업을 알선하는 상담활동이 해 프닝처럼 일어나곤 했다. 공장으로 흡수되는 정식적인 경로를 가지지 못했던 미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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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은 임시적으로 친척 등의 소개를 통한 식모살이부터 시작하는 것이 보통이 었다. 하지만 이렇게 지인의 집에서 시작한 식모살이는 숙식을 해결해 주는 것 외 에는 무급노동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작더라도 현찰을 만져볼 수 있는 공장노동 자는 , 특히 중소규모가 아니라 월급에 대한 보장이 확실하고 기숙사나 유니폼까 지 지급되는 대규모공장의 노동자는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좀 더 나은 대안이었 다. 하지만 이들의 대다수가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식모’와 ‘여공’의 존재는 ‘가족 의 돌봄이 부재한 위험한 여성’으로 그려지면서 건전한 가정의 질서나 사회기강을 무너뜨릴 수 있는 존재로 재현되기 시작했다. 여성피고용인을 가리키는 봉건적 용 어인 ’하녀‘가 ’식모‘라는 말로 대치되었고 , 당시 영화들을 보면 미혼 여성노동자 들이 하층계급의 팜므 파탈로 간주되어 도시의 정상적인 중산층 가족에게는 위협 적인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김소영, 2000) 여성지도층에서는 이들에게 가정을 빠 져나가는 것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알게 해주어야 하고 각 가정을 통해서 심리 적 정서적 교양을 시켜 윤락행위로 빠지는 것은 예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시 기의 ’가정‘이라는 것은 ’거리의 여성‘과 ’정숙한 여성‘을 나누는 공간적인 경계로서 기능하게 된 것이다 (신건, 2001: 78)

B씨 도시에 처음 왔을 때는 외가댁에 기거해서 별다른 불편함을 전혀 못 느 끼지 못했었고 그러다가 나중에 혼자서 자취를 시작하면서는 친척어른이 꼭 보름에 한번씩은 방문을 하셔서 사는 것을 봐주시고 했어.. 도시에 살면서 주의할 점이나 몸가짐 조신하게 하라고 당부도 하시고 ... 또 주 인집 아주머니 아저씨께도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도 드리고 그려셨지... 그때 주인집 아주머니가 참 이뻐해 주셨는데 , 며느리로 삼겠다고... 그 땐 무작정 상경해서 공장에나 다니는 사람들도 많았었는데 그런 사람들 하고 어울리게 되면 나쁜 짓 하는거나 배운다고 조심하라고 하셨지...난 아버님 친구분이 하시는 은행에서 일을 하게 되었으니까 그런 사람들이 랑 어울릴 일은 없었지만. N씨 사촌언니가 그곳에 살아서 그 집에 가서 살았어요.. 또 사촌언니 남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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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직에 있어서 그쪽 (교육계)에 관한 정보들을 많이 들을수가 있었어 요...여자 직업으로 선생님 만한 것이 없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으니까... 그때 받은 도움의 영향으로 나중에 교육 교사 자격증도 무사히 따게 되고 직장도 얻게 되었으니까... 참 고맙지요 ..

B씨와 N씨와 같이 가족의 보호망 아래에서 안정된 거처와 생존을 보호받을 수 있었던 여성들은 도시로의 이주후에도 여전히 ‘조신한 처자’로 자신을 그려낼 수가 있었다. 하지만 가족의 보살핌을 받는 처지가 아니라 반대로 가족의 생계까지도 책임져야 했던 여성 공장노동자들은 자신의 거처와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는 방 법들을 스스로 찾아야만 했고, 여성 공장노동자들이야말로 근면하고 내핍하는 생 활을 하는 국가재건의 실천적인 파트너였음에도 불구하고 , 스스로의 삶을 합리적 으로 관리하고 계획하는 근대의 세례를 받지 못해서 계몽되어야 하는 사회의 주 변적 집단으로 표상되었다. 60년대 말에 이르러 여성공장노동자들은 ‘저소득 근로여성’이라는 명칭을 획득 하면서 여성문제의 중심으로 진입하게 된다. 이제 이들은 국가로부터 ‘산업역군’이 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으며 주요한 여성인력자원으로 인식되기 하였지만, 이를 위한 여성인력의 전반적인 기능공화32)의 요청에 의해 여성공장노동자들이 수행하는 노동의 ‘미숙련성’ 문제로 인하여 지적받기 시작했다.

단지 토지와 노동

력만 투입하면 되는 저임금 노동력 의존의 산업구조는 국내외 경제상황의 변화에 따라 그 취약함을 드러냈고 , 이러한 경공업 중심의 수출산업은 이제 점차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고향을 떠난 그녀들의 눈앞에 펼쳐진 현기증나는 도시의 풍요는 그녀들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하루 세 끼 밥조

차 해결하기 힘겨운 공장일을 하는 것뿐이었고 이제 그마저 해고의 위협 속에서 지켜내기 위해 노력해야 했지만 그런 그녀들의 현실은 조롱받고 있었다.

32)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인력개발 정책 중 특히 훈련에 역점을 주고 있는 부문은 기능공 이다. 3차 5개년 계획이 끝나는 1976년까지 154,700 명의 기능공 부족을 예상하고 이 대 책으로서 기능공 공급원 확충계획을 과학기술처는 수립하였던 것이다. <여성 1970년 7 월>(신건, 2001: 79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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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성냥공장 성냥공장 아가씨 하루에 한갑 두갑 일년이면 삼백육십갑 치마 밑에 숨겨 놓고 정문을 나서다 치마 밑에 불이 붙어 백보지가 되었네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는 백보지

부천의 설탕공장 설탕공장 아가씨 하루에 한포 두포 일년이면 삼백육십포 치마 밑에 숨겨 놓고 정문을 나서다 치마 밑에 봉지 터져 꿀보지가 되었네 부천의 설탕공장 아가씨는 꿀보지

< ‘성냥공장 아가씨’ 가사 전문>

공장에서 무엇인가 하나씩 몰래 물건을 빼돌려야 할 정도로 생활고를 겪고 있 었던 암담한 현실이 성적인 조롱으로 바뀌어져서 사람들의 입에서 “성냥 공장 아 가씨” 와 같은 짓궂은 노래로 오르내렸다. 비록 이 노래는 당시 술자리에서나 입 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가요였지만 여성공장노동자들은 이러한 노래가 장난스 럽게 불리어 지는 것을 들을 때면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하여져 도 괜찮을 거라는 믿음은, 여성 공장노동자들이 보호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사실로 부터 나온 것이었다.

강력한 ‘아버지’ 또는 ‘오빠’로부터 일상을 관리 감독받지 못

하고 ‘정상적인 가정’으로부터 유리되어 있는 여성 공장노동자들은 이미 성적으로 보호받지 못한 , 또는 보호해야 할 가치가 없는 ‘이미 내둘려진’ 또는 ‘깨진 그릇’ 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사실 초기 산업화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중간계층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당한 것 은 흔한 일이었다. 다른 나라에서도 초기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인 이미지는 거 의 예외없이 더럽고 거칠며 비도덕적인 것이었다. 대다수의 농춘 출신 공장노동자 들은 교육이나 문화적인 측면은 말할 것도 없이 음주 노름 매춘 등에 대한 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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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이나 도덕적 훈련 면에서 형편없는 사람33)으로 취급되고 있었다. (Simth , 1988) 하지만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등장한 새로운 공장노동자들은 규율적인 면이 나 도덕성의 측면에서 다른 여타 계층의 사람들과 비교하여 특별한 결함을 발견 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대중매체에서 한국노동자들의 사 회적 행위에 대한 기술에서 부정적인 언급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었다(구해근 2002 : 192).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여성공장노동자들은 헤프고 성적으 로 문란하다는 비난을 아무런 근거 없이 받아야 했으며, “공단안에는 처녀가 없 다”는 악랄한 소문34)이 퍼져 고통을 받아야 했다(유동우, 1984: 44). 도시에서 주변화된 여성들의 공적공간은 ’성적인 방종‘과 동일시되었다. 사회 적 관심과 보호를 받지 못했던 여성들 , 예컨데 도시의 개인 가정집 식모나 버스 여차장 그리고 저임금의 생산직 노동 여성들은 언제라도 밤거리의 여성이 될 수 있다는 요보호의 대상으로 떠오르게 된다. ‘여공’들의 생산직 노동이 사회적으로 ‘육체적인 혹사’ ‘근로시간의 무제한’ ‘저임금’ 등으로 상징되면서 이러한 저임금과 장시간의 노동착취로 인해 이 ‘어린 소녀’들은 박탈감이나 좌절감을 가지게 것이며 마침내는 윤락행위 등으로 쉽게 빠지게 될 위기에 처해있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 는 것이다. 공장에서 시들어 가는 ‘영자들’이 결국은 성적 노리개감으로 타락할 것 이라는 조롱35)까지 생겨난 것이다. 심지어 67년에 열린 한 윤락여성의 선도를 위한 좌담회에서는 윤략녀들의 이 전직업을 “직공 317 식모 280 무직 1626 기타 615”라고 밝히며 여성 공장노동자들 을 윤락행위의 예방차원에서 최고요소를 가진 위험직업군으로 분류하면서 여성운 동 지도자들과 정부 당국의 관심을 촉구하기도 하였다(신건 , 2001: 76). 여자 혼 자의 공장노동으로 생존을 책임지기에는 세상이 그리 만만치 않다는 것을 잘 알 고 있었던 사람들은 이제 ‘여공’의 미래에 대한 암울한 예언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33) Smith, Thomas C. 1988. Native Sources of Japanese Industrialization, 1750-1920. Berkeley :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34) 유동우 . 1984. 『어느 돌멩이의 외침』. 서울: 풀빛 35) 영자의 손목이 버스간의 손잡이더냐? / 이놈도 잡아보고 저놈도 잡아보고 영자는 십팔 년 / 영자의 가슴이 가게집의 쭈쭈바더냐? /이놈도 빨아보고 저놈도 빨아보고 영자는 십팔년// 1970년대 당시 구전되었던 <영자송Ⅱ 가사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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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씨

다른 공장 친구들이랑 같이 어울려서 방을 하나 얻어가지고 살았었는데... 내가 살던 집에는 그런 식으로 방을 빌려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많았거든 요.... 근데 어쩌다가 한번 월급날 같은 때 친구들이랑 어울려서 좀 크게 웃으면서

놀고 그러면 주인집 아줌마가 별로 안 좋게 보는 것 같았어

요... 같은 집에 세 사는 남자들이랑 웃으면서 인사주고받아도 이상하게 쳐다보고요...그러다 한번은 집에서 안 좋은 소식이 와서 너무 속이 상해 서 술을 많이 먹고는 밖에서 훌쩍거리고 우는데... 아줌마가 ‘갈보될 년’하 고 나한테 중얼거리면서 가는 거야... 정말 남의 사정 잘 알지도 못하면 서 그럴 수 있는지 ... 술좀 먹었다고 다 그렇고 그런 여자되나요? 너무 기가 막혀서 따지지도 못하고 ... 정말 든든한 오빠 한 명만 옆에 있어 도 저렇게 막 대하진 못할텐데 그런 생각이 들고, 나도 고향 있을 때는 반듯한 집안이라는 소리 들었었는데... 나도 가정교육 받을건 다 받은 사 람인데 .. 지금 공장다닌다고 무시하나 싶어서 ...

철없는 ‘영자들’이 결국은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서 있는 요통을 참지 못하고 어 둠의 딸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는 암묵적인 결론 속에 수많은 여성 공장노동자들 은 잠재적인 윤락여성으로 다루어졌다. 여전히 순정과 순결이 여성의 필수 덕목으 로 자리매김 하고 있던 시절, 가정의 보호은 거리의 여성과 정숙한 여성을 나누는 기준으로서 설정이 되었고 여성 공장 노동자들은 정신적 , 신체적인 결핍과 더불 어 도덕까지도 결핍된 대상으로까지 판정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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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장 미혼여성공장노동자의 개별적 생존전략 이 장에서는 19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초기공업화 시기에 공장노동을 견뎌왔 던 여성공장노동자들이 1970년대 중반에 이르기 전까지 어떤 방식의 생존전략을 구사하였는지를 추적할 것이다. 1960년대 중반에서 1970년대 중반이라는 시기는 이후 70년대 후반의 노동운동이 활성화되기 전의 시점으로 여성공장노동자들은 집단행동을 통해 사회적 상승이동을 추구하는데는 별 관심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이들은 지속적으로 성장해가는 경제와 확대되는 취업시장을 목도하면서 개인적으 로 경제적인 성취를 추구해 나가고 있었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그 동안 여성공장 노동자들을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에의 ‘희생자’에 불과한 나약하고 수동적이며 정태 적인 존재로만 바라보거나 70년대 후반 일어난 여성노조운동의 거룩한 순교자로 바라보는 이분법적인 인식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며 다른 관점에서 여성공장노 동자들을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먼저 1절에서는 여성공장노동자들이 가부장적인 질서에서 탈피한 독립적 임금노동자로서의 자립가능성은 없었는가에 대하여 이야 기해볼 것이며 2절에서는 가족주의적인 질서를 선택하는 것이 여성공장노동자들 의 생존전략에선 어떠한 의미를 지녔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3절에서는 여성공장노 동자들의 삶에서 유리한 전략이라고 판단한 결혼시장에서 그들이 매력적인 신부 감이 되기 위한 과정들을 다루어 볼 것이며 4절에서는 이러한 결혼시장을 통한 신분상승에 성공한 사례를 중심으로 하여 이들의 계급상승과 신분재생산을 위한 노력들을 추적해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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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독립적 임금노동자로서의 자립가능성

이 절에서는 급격한 산업화와 광포한 생활환경의 변화에 휩쓸리며 사람들이 가졌던 삶의 고단함 속에서 그 힘겨움만큼의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 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그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한다. 역사의 모든 지점 들은 각각의 장단점을 가지고- 한 개인에게 장단점이 동시에 주어지지는 않더라 고 적어도 그 속에서 유리한 인간과 불리한 인간은 존재하고-있다는 사실을 상기 하면서 오히려 이 급격한 변화가 이전의 틀 속에서 고통받는 이들에게는 기회로 서 작용하지는 않았는가 하는 점을 밝혀보고자 한다. 그것이 여성노동자들에게는 삶을 매몰시켜야 하는 공동체적 신분적 억압을 떨치고 가부장적 속박에서 벗어나 는 계기가 되어, 스스로 노동하며 자아를 돌보는 노동자주체로서의 가능성을 얻을 수는 없었을까. 하지만 서구의 노동자 주체형성과정을 따라 한국의 여성공장노동자를 설명하 고자 하면,

서구의 산업화 과정에서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자율적인 개인의 형

성이 우리의 현실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것이 발견된다. 분명 개인과 가족은 폐쇄적이며, 폐쇄적일 수 있을 정도로 노동과 생활에 있어 자율적이라는 명제는 맞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60년대 이후에 나타난 산업화 과정에서 발생하게 된 개인은 결코 이전의 공동체적 기반과 유리된 폐쇄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고향에는 가난하지만 따뜻한 가족이 있었고 나는 그들을 위해 돈을 벌어 야 한다는 일념으로 모든 것을 참을 수 있었다. 해질 무렵 스피커에서 울 려나왔던 ‘나의 살던 고향은’이라는 노래는 가슴에 멍울이 들게 하였 다.”(51세 여성 A씨)

이것은 결코 서구의 과정처럼 우리도 반드시 개인이 철저히 유리되고 폐쇄적 이어야만 한다는 당위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하지만 공장노동에 참여하기



전의 촌락 공동체에서는 개인의 기본적인 생활 기반이 공동으로 존재하고 개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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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보다는 시종 사회적인 존재로 생사 고락을 함께 할 수밖에

없었기에 그러한

공동체적 유대 속에서 개인은 자신의 삶을 매몰시켜야 했고 신분적 억압에 짓눌 리기도 하였다는 부정적인 측면을 생각해볼 때, 촌락 공동체를 벗어나 도시로 이 주하여 공장노동에 참여했던 여성들이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에 대항하는 새로운 삶의 대안들을 실천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는 없었는가 하는 점이다. 하지 만 연구에서 드러난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오히려 여성공장노동자들은 이중의 대 가를 치루는 것 처럼 보이다. 여성공자노동자들은 공동체적 삶에서 가졌던 누렸던 사회적인 안정과 공동체적 유대는 상실하였음과 동시에 노동과 생활에 있어서의 충분한 자율성 또한 확보하지 못하고 오히려 좁아진 사적 유대와 도구적 관계망 속으로 자신들의 삶을 재구성해야 했다. 먼저 여성노동자들은 남성노동자와의 현격한 소득격차를 받아들여야 했다. 1975년 평균여성공장노동자의 월급은 평균 남성 공장노동자월급의 42.9%에 불과 했다36). 이러한 비율은 1985년 46.9%와 1990년 53.4 로 조금씩 개선 되어가고는 있었지만, 임금구조의 면에서 한국은 성적차별이 가장 심한 사회중의 하나였다. 1970-80년대 한국노동자들의 평균임금 인상률이 놀랄만큼 빨리 상승했음에도 불 구하고 , 생계비 이하의 소득을 받아야만 했던 노동자들의 대다수는 의류 섬유 신 발 제조업등에 종사하는 여성공장노동자들이었다. 더구나 절대 다수의 여성공장노동자들은 10말에서 20대 초의 미혼 반숙련 노 동자들이었다. 1966년에는 전체 여성공장노동자의 약 90%가 29세 미만이었고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도 전체 여성공장노동자들의 2/3은 29세 미만이었다. 이 것은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해서 여성들은 결혼 후에는 공장생활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는 말한다. 기혼 여성들이나 나이가 들어 경력이 쌓인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고용주들의 차별적인 태도는 나이가 든 여성들을 임금비용을 줄이면서 새롭고 어 리며 다루기 쉬운 노동자로 대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여성공장노동자들의 도시적응과정을 살펴보자. 여성공장노 동자들의

도시이주초기에서부터 나타나는 사회-경제적 지위 상승을 위한 노력들

36) 1980년을 기준으로 하여 본다면 여성공장노동자의 평균월급과 남성공장노동자의 월급 은 95,692원 대 222,956원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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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대체로 생계와 주택문제 해결에 그 초점을 두고 있었다. 직업과 주거의 연관은 상당히 밀접한 것으로 영구적인 정착과 자립을 위하여서는 직업과 소득이 안정적 일 필요가 있는데 이러한 고용과 소득이 안정되는 임금노동자나 자영업자가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취업자격이나 재투자 할 수 있는 자본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러 한 자본이 결여되어 있고 연령 학력 기술 등의 이유로 고용상 불리한 위치에 놓 이게 마련인 여성공장노동자들에게 고용과 소득의 불안정성을 해결할 수 있는 자 구책의 하나는 바로 관계망의 형성이었다.

51세의 여성 K씨는 외숙모 댁에서 집안일을 도와주면서 일차적인 주거지 를 마련한다. 우선은 일을 많이 해주고 빨리 외숙모님의 신임을 받아야 했기에 부엌일 ,집안청소, 아기보기 점원노릇까지 자청해서 하였으며 그곳 에서 알게된 방직공장 반장 언니의 도움으로 방직공간에 들어갔다. 그 이 후에 고향이 다른 동료 3명과 한방에서 자취를 하게 되었으며, 비슷한 공 장에 다니는 6세대가 한 지붕 아래에서 살았는데, 공장에서 일감이 없다 고 해고되거나 하면

같은 집에 사는 이들이 서로 다른 곳을 소개해 주

곤 했다.

이러한 사회적 연결망은 이주 직업선택 기술습득 고용과정 등에 대하여 폭넓 게 작용하며, 생존을 위한 경제생활을 사적으로 추구하는 과정에서 공식적 집단 관계보다 사적 관계망이 이익추구의 수단이 되어 개인적 이익을 만들어 가는데 사적 집단 관계의 도움을 기대하게 되었다. 여성공장노동자들이 가졌던 관계망의 성격을 좀더 명확히 포착하기 위해서는 도구적 성향이 강한 관계37)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특히 취업시 동원되는 관 계는 관계망의 도구성을 확인시켜주는 것으로 유용한 척도인데 한국사회의 취업 시 효율성이 높은 관계는 가족 중심의 친족관계이며 적극적인 연줄 동원 행위에 37) 도구적 관계는 사회적 희소성이 강한 물질적 자원이 교환되며 행위의 전략성이 크게 고려되는 연줄로서 사회적 위치의 승계나 공적 조직의 인원 충원시 동원되는 관계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김선업, “한국사회의 변동과 사회적 결속방식”, 「한국 사회의 이 해」, 1996년, 4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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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가족 친척의 역할이 큰 것으로 나타나 도구적 성격이 강할수록 가족 친척과 같은 강한 연줄이 좀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전략성이 요 구되는 관계일수록 관계망의 집단적 폐쇄성이 더욱 커지는 양상을 나타내는 것이 며 평소에 유지되고 있던 연줄이라 하더라도 혈연이나 학연과 같은 폐쇄적 집단 성이 전제되지 않은 경우에는 유용성에 한계가 있는 것이며 행위의 전략성이 크 게 강조될수록 가족 관계와 같은 통합성이 높은 ‘강한 연줄’이 효율적으로 나타나 게 되는 것이다.38)

이는 중상류층에 속했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50세의 여성 B씨 경우 도 시에 처음 와서는 외가댁에 기거하였으므로 불편함을 전혀 못 느꼈으며 직장을 찾는데 있어서도 부모님의 주선으로 일이 주어졌으며 특별히 이 웃의 도움을 받은 경우는 없었다고 한다. 51세 여성 N씨는 시누이가 그 곳에 살고 시누이 남편이 교직에 있었으므로 교육계에 관한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이의 영향으로 그후 교육 교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직장을 얻 게 되었고 공부하면서 만난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친족을 중심으로 하는 일차적 연대가 지니는 효율성이 도시나 산업사회공간에 서도 그대로 유지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특정상황에서는 일차적 관계가 오히려 강화되거나 새롭게 발현될 수 있다는 사실들이 발견되는 것이다39). 산업화에 따라

38) 이는 행위의 도구적 성격이 강조될수록 약한 연줄 이 오히려 효율적일 수 있다는 서구 사회의 ‘약한 연줄의 이점론’의 주장과는 상반되는 이론적 함의를 보여주는 것이다.

39) 그간의 공동체 붕괴론이 지나치게 단선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으며 산업사회의 일차적 관계의 성격을 규명하기 위한 이론적 작업들이 이 어지고 있다. 이것과 관련하여 전통적인 가족 친족 질서가 자본주의 경제질서 수립과 농 지개혁 분단국가 수립으로 인해 새롭게 변형되기 시작한 한국 전쟁직후의 50년대야말로 이후의 고도의 자본주의화된 오늘날의 한국 사회의 기원을 이룬다는 지적이 있다. (김동 춘, “1950년대 한국 농촌에서의 가족과 국가”, 「1950년대 남북한의 선택과 굴절」,역사 비평사, 1998년) 이는 한국 자본주의가 단순히 자본주의 시장경제라는 보편적인 원리에 기초하여 작동하 는 것이 아니라 공업화 이전부터 존재해온 한국의 독특한 정치사회질서 , 특히 전통적 가족 친족 관계, 국가와 민의 관계가 현대적으로 변형된 기초 위에서 운영된다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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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 관계가 좀 더 순수한 개인적 관계로 이행되는 서구의 전형적인 모습과는 달리 한국 사회에서는 전통적인 관계를 형식적인 기초로 그 강도를 높임으로써 개인적 관계를 통한 사회적 적응이 이루어진 것이다40). 개인의 의도에 따라 도구 적 효율성을 강조하는 점에서 개인주의적인 특성도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귀속 적이고 일차적 연대가 관계의 핵심적 기반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일차적 관계 의 전면적 약화를 전제하는 전형적인 산업사회의 유형과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일단 자원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여성공장노동자가 독립적 임금노동자로서 자 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회적 보호망이 필요하였다. 하지만 도시 적응과정에서 부터 이러한 국가 사회적인 장치의 부재로 인하여 도시정착과 구직, 생계해결 등 이 모두 개인적인 해결로 귀착되게 되었으며 사적인 관계망의 형성은 그들의 생 존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더구나 기존의 공동체가 완전히 사라진 것 도 아니고 개인이 노동과 생활에서 충분히 자율적인 존재로 서지도 못한 채, 이전 의 공동체가 가졌던 장점은 사라지고 좁아진 사적 관계망만이 도구적으로 남게 되는 이중의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생존과 교육 취업 등의 삶의 모든 부문에서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힘을 발휘하게 되는 가족주의적 관계망을 여성공장노동자들이 몸소 체험하게 되면서, 여성 공장노동자들이 이전의 가부장적 인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는 무산되었다.

2절

가족주의와 여성공장노동자 1. 가족복지를 위한 노동 : 가족 내 출세할 남성을 길러내기

집을 떠나 가혹한 공장노동을 견뎌야 했던 여성들이 공장노동을 지탱해 나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주요한 전략중의 하나는 자신의 노동을 통해 가족의 복지가 40) 여기에서의 개인적 연줄과 좀더 거시적인 사회적 구조와의 연결방식은 “내부세계에서 의 강한 관계는 외부세계에서 약한 관계를 낳는다”는 서구의 명제와는 상반되는 것으로 강한 내적 관계가 강한 외적 관계를 가져온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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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장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노동 현장에서의 미혼여성들이 경험하게 되는 것은 독립적인 노동주체로서의 정체감이 아니라 부모, 형제를 위해 일하고 있다는 도덕 적인 만족감이었다.

그녀들은 가족 내의 대표 주자가 될 ‘오빠’나 ‘남동생’들을 길

러내기 위해 책임을 부여받았으며, 그 임무를 계속하고 있는 한 사회적인 멸시와 는 상관없이 여전히 ‘착하고 책임있는 딸’이라는 호명을 받을 수 있었다.

P씨 우리 엄마, 아버지는 대화가 안통해서 매일 싸웠어. . 그러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는 엄마가 재혼해 버렸거든 그래서 온 가족의 부양을 내가 떠 맡았았지...동생들 한테는 내가 어머니였거든... 나중에 결혼하고 나서 도 동생 네 명이 전부 우리집에서 얹혀 살았고 직장을 얻거나 결혼할 때 까지 내가 보호를 해주었지 ...특히 막내 남동생은 내가 대학까지 보냈 는 걸... 그래서 나중에 좋은 집안의 딸이랑 결혼도 하개 되고..그게 돌 아보면 제일 큰 보람이지.

여성공장노동자의 어머니의 역할까지도 대신 할 수 있는 ‘착한 딸’이라는 전통 적인 가치를 충실하게 운반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전통적인 가 치를 온 몸으로 습득한 것은 바로 그녀들이 보고 자란 어머니들 때문이었다. 여성 공장노동자들이 도시로 이주하기 전인 1950년대에 그녀들이 보아온 어머니는 ‘아 버지의 부재’ 또는 ‘무능한 아버지’로 인하여 생활을 책임지는 사람의 역할이었다. 그녀들의 어머니는 6.25의 피폐화된 한국적 상황 속에서, 아버지의 부재를 온몸으로 떠안고 그

빈자리를 자식을 바라보면 살았던, 실질적인 생계부양자이면서 전통적인

현모양처의 규범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했던 모습 이었다.

“시집오고 일주일 만에 동란이 난거야. 그 사람은 서울갔다가 그렇게 헤어지 고 말았지.” (60대 Q할머니) “나는 일할 팔자야. 또(막상) 내가 쉬어도 난처한게, 내 세계가 삼십년동안 딴 데 묻히지 않고 이 세계에 묻혔는데 이제 새로 생활을 한다면 어떤 식으로 생활을 하고 외로울까...내가 (노는 것을) 삼십년 동안 잊어버렸어. 저쪽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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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나 혼자 살던 생활을 잊어버려서 가끔 생각해 봐도 어떡헐까(망설여)...” ([주민 생애사를 통해 본 20세기 서울 현대사]재인용)

가족 내 아버지의 부재는 시대에 따라 그 원인이 달랐다. 식민지 시대에는 독립군 으로 혹은 징용으로, 해방 후에는 전쟁으로, 또는 이산으로, 산업화시기에는 월남전으 로 중동근로로, 정치적인 요인으로든, 경제적 요인으로든 한국의 남자들은 집안에는 부 재할 경우가 많았다. 여기에서 산업화 이전에 사라진 아버지들은 상징화된 존재로 치 환되어 남겨진 아내와 딸들이 복원해야 할 대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결혼한지 일주 일만에 떠난 남편을 기다리며 50년을 보내온 Q씨에게도 그 집안을 상징하는 것은 역 시 상징화된 남성의 모습이었다. 여성공장노동자들이 참여하게 된 산업화 이후에도 이러한 가족 유지의 실질적 역 할 수행은 여성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가족 내부에서의 아버지의 부재는 여성 중심의 모성 이데올로기를 작동시켰지만 이것이 상징화된 아버지 역할에 대한 계속된 답습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은 가족중심적인 사회구조와 압축적인 산업화 속에서 그 가 족을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 살아 남기 위한 당연한 결과였다. 스스로를 찾기보다는 상 징적 아버지를 대신하는 편이 쉬운 세상인 것이다. 또한 사회 역시 여성들의 공적 영 역으로서의 노동 현장을 격하시키고 폐쇄시키게 만듦으로서 이러한 답습을 강요한다. 하지만 이처럼 당시 여성 공장노동자의 수입이 가족의 주요한 수입원으로 작 용하고 있던 상황은 그녀들에게 부담감인 동시에 힘든 노동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가 되었다. 그리고 언니의 이 같은 ‘선행’은 또다시 그녀들의 여 동생들에게는 훌륭한 귀감이 되어 유사한 방식의 희생들이 잇따르게 만들었으며, 언니들의 귀향길을 뿌듯하게 만들어 주었다.

R씨 난 언니가 보내주는 돈으로 그래도 중학교 까지는 했어요.. 중학교 졸업 하고 나니까 이제는 내가 동생들을 챙겨야 할 차례더라고요 ... 이제 언 니는 시집갈 준비도 해야 하고 혼수도 마련해야 하니까 월급을 예전처럼 다 내놓을 수가 없잖아요... 내 아래로 남동생이 둘 이 있었는데 공고라 도 마치게 해주어야 나중에 엄마라도 걔네들이 제대로 모시지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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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언니가 일하는 공장으로 나도 따라서 들어갔죠. K씨 추석이나 설날이 되면 있는 옷 중에 제일 좋은 옷 골라서는 입고 가는 거야... 엄마 드릴 선물도 사고 뿌듯하지... 버스에서 내려서 걸어가다 보 면 우리집 밭가는 길이 나오거든... 그게 내가 월급모아서 보낸 돈으로 한 평 두평 산거야 ... 일부러라도 그쪽으로 한번 들러서 그 밭 옆으로 지나 가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 그게 누가 산건데... 지금도 우리 엄마, 이 젠 많이 늙었지만 항상 그 말씀을 하시지... “그 밭, 니가 어떻게 해서 산 건데...니가 얼매나 고생해서 산건데.. ” 라고.

설사 남자들이 선망하는 매력적인 여성은 못될지라도 , 주인집 아주머니에게 행실에 대한 오해의 눈길을 받을 지라도 , 사회적인 하층민으로서 조롱을 받을 지 라도,

‘효’를

실천하고 있다는 자긍심 또는 윤리적인 만족감은 순박한 여성공장

노동자들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제 여성공장노동자들은 가족 전체의 복리를 증진시키기 위한 방법으 로서 가족 내의 ‘대표남성’을 길러내는 길을 선택하게 된다. 1950년대에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남성들이 전반적으로 신체적, 경제적인 무능력을 경험하는 가운데 여성들 이 가족 구성원의 생계를 책임지는 실질적인 부양자로서 활동하였지만, 1960-70년대에 는 정부주도의 공업화 프로젝트가 남성들의 경제영역 진출을 확대시키면서 공적 영역 을 남성 중심적인 지배체제로 공고화하고 남성들은 그들의 권위를 회복하기 시작하면 서 견고한 남성성을 구축하여 나갔고 이제 여성들은 공사영역에서 자신의 존재를 남성 들의 보완적 존재로 되어 가게 할 시기가 온 것이다. 이제 가족의 ‘착한 딸’들은 오빠와 남동생을 집안의 대표주자로 만드는 일에 자신 의 자원을 투여하기 시작했다. 여성공장노동자들에게 공장노동에의 참여는 가부장 적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라기 보다는 가족전체의 복리를 위한 것이었으 며, 보다 튼튼한 가족주의적 관계망의 형성을 위하여 가족 내의 남성을 길러내는 보조적인 조력자로의 역할을 다하는 가부장제 강화의 공모자가 되고 있었던 것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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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새로운 가족의 형성을 통한 연줄망 구축

한국 사회의 전통적 규범이었던 가족주의의 원리는 산업화 과정을 통해 표 면적인 형태는 분명히 핵가족이 주도하는 형태로 변화하였지만 내면적으로 여전 히

개인들 사이의 상호 작용의 연결망이 여전히 이전의 확대 가족적 기반을 유

지41)하고 있었다. 즉 산업화가 곧 전통적인 가족주의 해체까지 의미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이러한 전통적 요소가 산업화의 과정에서 그 기반이 되기도 하고 더욱 강 화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제 개인의 속하게 된 공동체는 동족부락의 문화적 경제 적 유대감을 기반으로 한 협동의 지역공동체가 아니라 변형된 확대 가족들 사이 의 범위로 축소되었으며 이 안에서 개인들 사이는 수단적인 도구로서 설정되고 그 외의 영역은 극단적인 갈등 경쟁 관계로 설정되었다42). 조선시대부터 대가족은 일정한 재산을 소유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였기에 확 대가족보다는 핵가족이 보편적이었지만 이러한 핵가족화는 전쟁후의 인구의 증가, 가족의 해체, 농지개혁으로 인한 지주세력의 물적 기반의 와해 등과 맞물려 더욱 보편화되게 된다. 기본적으로 가족은 공동사회의 가장 전형적인 조직으로서 엄격 한 가부장주의를 기초로 하고 있으며 친족 질서 역시 이러한 상하우열과 성별 차 별에 기초해 있다. 결국 이러한 소규모 가족으로의 재편은 직계남성 가장의 권위 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핵가족의 가장의 통제력과 핵가족 내부의 결속이 더욱 촉진되는 방향으로 나아갔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같은 핵가족화가 개 별 가족 내에서의 가장의 권위약화와 여성의 권리신장 구성원들의 독립적인 인격 과 자율성의 강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외형적인 핵가족화가 급격히 진척 41) 김동노, “국가의 정당성 결여와 생활 세계의 왜곡”, 『현상과 인식』21권 1호 ,1997년 봄, 89p에서는 근대화의 결과 한국에는 일련의 핵가족이 서로 평등한 기반 위에 연결되 어 확대 가족적 가치를 최종적 목표로 서로 상호작용하는 ‘변형된 가족주의’가 탄생하였 다고 지적하고 있다. 42) 자본주의 사회 혹은 시민사회는 자본주의적 생산 계약 거래관계에 부응하기 위해 가족 의 경제적 기능을 사회에 양도하고 그 대신 개인으로 하여금 가족 우대, 가족 복지의 테 두리를 벗어나 새로운 사회의 구성원 ,자치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사고하고 행동하도록 요 구하는 것이 기본이다. 즉 탈가족적인 사회적 결속과 규제체제, 보편주의적인 법질서와 공공의 규범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근대국가에서 국민적 통합성은 전국적인 시장권의 확립과 전통적인 신분질서의 파괴를 통해 가능해 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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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 데 비해 내용적으로 직계가족의 관행과 규범은 상당부분 유지된 것으로 나타 났다. 따라서 사람들은 독립적인 개인으로 존재했다기보다는 여전히 가족단위 혹 은 가족과 친족 집단의 정신적 실질적 통제를 받는 구성인의 한사람으로 존재하 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전통사회의 규범이었던 가족주의는 개인의 행위를 결정하는데 있어 가족의 유 지가

최우선이 되는 것으로 사회의 기본적인 단위는 가족이며 가족 지향적인 태

도가 다른 것에 우선한다. 하지만 이것은 혈연인 가족과 동족인 지역공동체가 중 복되면서 개인이 인식하는 범위는 토지를 공유하는 공동체로서의 가족으로서의 지역공동체 안에서 협동의 형태로 관계망을 형성하였다. 하지만 산업화와 함께 변 형된 가족주의는 가족의 이익과 공동체의 이익사이에는 일정한 단절이 있음을 전 제로 하여 개인 사이의 관계망은 지역공동체로의 확장이 아닌 변형된 확대가족사 이로 축소되고 그러한 가족주의적 관계망도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영역에서 경제적인 목적으로 사용되게 되는 것이다.

T씨 조상대대로 터를 잡고 많은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많은 직원과 종업원을 거느린 집안의 무남독녀로 자라 어려운 생활고가 무엇인지 몰랐었는 데...하지만 부친의 죽고 나서 고향을 떠나야 했었어... 홀로 서기라는게 참 힘들잖아, 고생을 좀 했지...결혼은 결혼에 대한 설렘도 있었지만 내 겐 하나의 탈출구였어. 장래를 설계할 꿈도 좋았지만 남편을 통해 새로 운 꿈을 꿀 수 있다고 생각했지. 내 삶이 참 절망적이었는데 엇인지 알게 해주었다고 해야 하나....그 이후에

행복이 무

생활에 안주하면서 타

성에 젖다보니 내 발전에 대하여 노력하지 못한 것은 내 잘못이지만

여성공장노동자가 산업화시기에서 여성과 마찬가지로 무산자가 되어 버렸던 가장과 나란히 임노동에 종사하면서 가부장적인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기회 는 가족주의적 사고 방식 하에서 사라졌다. ㅊ인척과 혈연을 통한 정보 자원의 분 배, 사회적 편견으로부터의 정서적 방어막 등을 이유로 가족의 구성을 통한 생존 의 사적 보호망 마련의 필요성은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해 졌다. 가족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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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확대는 사적 보호망의 확대였고 ‘가족’은 여성공장노동자에게 생존의 키워드였 다. 이렇게 보편화된 가부장적 문화권내에서 빈곤화의 길을 겪어온 여성공장노동 자들에게

결혼의 선택이라는 것은 어쩌면 이미 규정된 삶의 방식이었다. 가부장

제에 깊숙히 내재된 성의식은 한국여성들에게서도 가장 느리게 변했다. 그 중에서 도 가장 극복되기 어려운 것은 바로 결혼에 대한 고정관념이었다. 어느 여성공장 노동자들에게서도 결혼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자신의 사회적 노동에의 참여와 그 를 통한 사회적 기여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발견하기 어려웠다43)(정현백, 1985). 노 동 현장과 맺는 관계가 취약할수록 사적인 의존성이 강화되고 결혼이외의 특별한 다른 신분 상승의 길이 없었다는 측면에서, 결혼을 통한 한 남성에의 의존이라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의 성장이데올로기가 주입한 빠른 성 취를 이성애적 결혼으로 조급하게 얻으려는 모습이기도 했다. 여성공장노동자들은 여성됨 때문에 당하는 지위 격하보다는 자본주의 사회의 폐해인 인간소외를 극복 할 수 있는 ‘돌봄’에 관여하면서 새로운 가족주의적 관계망을 확장시켜 나가는 길 을 선택했다.

K씨 당장의 학비는 고사하고 먹거리도 부족하여 주위의 아무에게나 시집 이나 가서 입하나 덜어 주어야 할 형편이었기에 공장에 다니긴 했지 만, 남편을 만나 지겨운 공장생활을 청산하였다. 나보다 월등히 조건 이 나은 남편을 만나 그와 가족이 된다는 것은 풍요롭고 늘 행복한 삶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대학을 나오고 지주집안의 남편은 나 의 자랑이었다. 난 결혼만 하면 힘겨운 삶의 문제들이 모두 해결되고 남편의 모든 배경이 내 것으로 되리라는 생각을 했다.

대부분 단독 이농을 했던 여성공장노동자들은 그 동기부터도 다분히 가족주의 적이며 - 가족의 생계를 보살피고 형제들, 특히 남자 형제의 성공을 기대하며 그 43) 정현백 .1985. 「여성노동자의 의식과 노동세계 : 노동자 수기 분석을 중심으로」. 『여 성』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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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것을 선택하며- 이 후에도 공간적인 분리가 있을 뿐 여전 히 가족의 일원으로서 살아갔다. 그리고 결혼을 선택하는 데 있어 자신의 삶이 남 편의 노동계급 주변에 생활을 조성하는 의존적인 피부양자로 전락하게 된다고 생 가하지 않으며 오히려 남편의 가족으로 편입되는 특혜를 기꺼이 받아 들여 또 다 른 가부장적 가정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러한 선택은 결혼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성별 중심의 분업에서 갈리는 남녀의 삶을 자신의 삶에 보다 유리한 것으로 평가 할 정도로 여성 공장노동자들에게 가부장적 가족의 형성과 유지는 당연한 가치관 이었다. 오히려 그들에게 이러한 또 다른 가족주의적인 관계망의 형성은 효율적인 것이었으며 반드시 필요한 플러스적인 요소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이들과의 면접에서 드러난 것처럼 자신의 결혼생활을 평가하면서 가족 안에서 자신의 삶이 사라졌다는 인식은 하고 있었지만, 생산 노동을 통해서만 생활이 확 보될 수 있는 상황에서 결혼이라는 생산 노동의 면제라는 특혜를 선택한 것은 자 립 기반의 상실 또는 사회적 존재의 상실을 반대 급부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까지 파악하지는 못하였다44). 차라리 그들은 결혼이라는 영역 안에서 제대로 조 율하지 못한 개인의 불행한 인생-배우자의 잘못된 선택이나 성격차이 또는 가정 경제의 실패, 자신의 무능-정도로 생각45)하였으며 그 당시에 결혼을 선택하지 않 는 삶-즉 가족주의적인 관계망에서 벗어나거나 또 다른 가족주의적 관계망을 형 성하지 않고도 여성 개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은 선택 가능한 답안에서 제외

44) 가정에서 이루어지며 가족성원의 생활욕구에 직접적으로 부응하는 가사노동이 여성에 게 반드시 고통인 것만은 아니다. 성별 분업의 구조가 취업의 균등한 기회를 봉쇄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현실적으로 적지 않은 여성들이 결혼과 유폐된 가정에의 안 주를 기꺼이 택한다. 하지만 가사노동이 가족 성원 전체의 여가가 아니라 전업주부의 생 업이라면 그것은 구체노동이 동시에 숨겨진 하인노동이기도 하다. 하인의 노동은 특정 개인에게만 봉사하며 그 개인으로부터 소득을 이전 받는 식으로 사사로이 인정받을 뿐 사회적으로는 없어도 무방한 여벌인 것이다. 여성 응답자들의 이 구체노동의 기쁨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희생이 담긴 지극한 봉사에도 불구하고 고양되기는커녕 피폐해진 까닭 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가정을 묘사하는 인간적인 수식어구도 가사노동이 간직한 구체 노동으로서의 미덕도 그녀들의 가사노동을 하인노동으로부터 구해낼 수는 없는 것이다. 45) “결혼은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노력하면서 받아들인 삶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 모든 삶이 짐이 된 것 같아 무거웠고 남편과 시댁식구들과의 관계가 매끄럽지 못하여 무척이나 힘들었다. 내가 좀더 현명하고 적극적으로 인생을 살았어야 했다. ”(48세 여성 F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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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어 있었던 것이다.

3절

신부감 되기 : ‘연애걸기’와 ‘여성다움’ 1. 공장바깥에서의 ‘여성다움’의 회복

여성공장노동자들이 자신의 ‘훼손당한’(혹은 훼손당했다고 믿어졌던) ‘여성다움’ 을 회복시키는 작업들은 바로 공장의 바깥에서 이루어졌다. 공장에서의 노동으로 그녀들의 여성성이 강하게 공격받고 있는 만큼 공장 바깥에서의 ‘여성다움’ 회복의 전략도 강력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들의 기본적인 전략의 방향은 일단 공장의 노동과 자신을 분리시키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S씨 출퇴근 시간때는 통근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그 버스를 기다리는 시 간동안 다른 회사 사람들도 만나게돼 .. 시간이 대부분 비슷하니까 버스 기다리는 동안 서로서로 보게 된다고... 그래서 난 공장에 가기만 하면 바로 탈의실에서 작업복으로 다시 갈아입더라도 출퇴근 때는 꼭 외출복 을 입고 모양을 내고 다녔지... 그때 누가 한 번 예쁜 옷 입고 가면 얘 들이 다 한번씩 물어봐 .. 어디서 했는지 얼마인지. ..또 일 끝나자 마 자 작업복은 벗어놓고.. J씨

퇴근 할 땐 하다못해 목에 색깔 고운 스카프라도 폼나게 매고 나가곤 했 어요 ... 공장밖에서 만나면

아마 제가 공장에서 일하는지 못 알아봤을

꺼에요...길가는 남자들도 여대생인줄 알고 쫓아 온 적도 있고요.....좋았죠.

여성공장노동자들은 공장에 다니는 표시가 나지 않기 위해 일부러 더 옷에도 신경을 쓰고 머리를 하고 화장을 했다. 누가 무슨 일을 하는지 물어도 ‘공장’에 다 닌다는 말 대신 그저 ‘회사’에 다닌다는 얼버무리곤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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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이 쉬는 날에 시내

에 나가는 일이 있으면 시집 같은 책이라도 들고 다니며 여대생인척 하기도 한다. 좀 더 적극적인 방식은 학력을 높이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많은 여성 노동자들은 “공장 생활하면서 학원정도 나가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으로 생 각”46)(송효순 1982, 99면)될 정도로 교회나 사설학원, 야간학교에 다녔다. 많은 여 성노동자들은 자신이 공장에서 여성스럽지 못한 일을 하고 있는 근본 이유가 바 로 ‘교육’때문이라고 생각했기에 장시간에 힘든 노동 후에도 악착같이 학교에 나가 려고 했다. 하지만 사실 이런 노력들은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기 보다는 심리적. 정서적인 것이었다. 교육이나 결혼 이외에는 실질적인 신분상승의 길이 없었던 여성공장노 동자들은 ‘공순이’라는 딱지를 떼고 여대생들이 하듯이 책을 펴고 있는 순간을 즐 기거나, 나중에 아무 필요가 없을지라도 더 좋은 결혼 상대를 만나기 위한 투자로 서 한자 꽃꽂이 요리같은 문화적인 기술을 배워두려고 한 것이다. (석정남 1984, 20면)

이렇게 짧은 시간이나마 자신이 ‘여성’임을 순간순간 확인하고자 했던 여성

노동자들에게 일년에 한 두번 있는 야유회나 회식자리는 그야말로 기다리고 기다 리던 이벤트가 아닐 수 없었다.

K씨 봄놀이 가을놀이 이렇게 2번 연례행사가 있는데... 편안한 옷차림으로 가는 게 아니라 친구랑 둘이서 맞춤 정장에 빽까지 챙겨 들고서 가는거 야... 그러면 우리 공장에 사진찍기 좋아하는 부장님이 있었는데. 예쁘다 고 우리 둘만 계속 찍어서 주곤 했어 ... 친구랑 그럴 때 입을려고 디 자 인은 같은데 색깔이 다르거나 아님 조금씩 디자인을 변형시킨 옷으로 맞쳐서 입는 걸 좋아했지.. R씨

동료들하고 같이 산에 올라가는데 미리 어떤옷을 입고 올지 고민을 같이 하는거에요.. 그땐 청바지가 유행이었거든요.. 산에 올라가는데 몸에 딜 딜 감기는데도 불편한지도 모르고 청바지 입고 위에는 빨간 조끼로 같이 맞쳐서 입고 그렇게 해서 산에 올라가고 했지요..그때 사진은 지금도 있

46) 송효순. 1982. 『서울로 가는 길 』. 서울 : 형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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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요.. S씨 친구들이랑 같이 양장점에서 옷을 맞쳐 가지고는 가봉도 하고 한참을 기 다리다가 찾아오는 날에는 같이 사진관에 들르는 거야.. 같이 포즈도 취 해서 사진도 찍고 그랬어... 그때 아마 코트 한 벌만 맞출려고 해도 몇 달 월급을 모아야 했으니까 .. 정말 큰 거였지 그건... 옷같은 거 살려 고 잔업도 더 하고 그랬으니까.

통근 버스를 기다리는 10여분의 시간을 위해 월급을 모아서 멋진 옷들을 어렵 사리 마련했던 그들은, 야유회 때가 되면 편안한 옷 대신 정장에 핸드백을 들고는 사진을 찍었으며, 맞춤옷이 마침내 자기 손에 들어오는 역사적인 순간이 되면 양 장점에서 나오는 길에 사진관에 들려 증명사진을 남기듯 자신의 ‘여성스러움’을 증 명하는 기록을 남기어 놓았다. S씨의 경우를 보면, 수출을 대단히 많이 하였다고 준 산업훈장수여식날의 회식 에 대한 기억에서, 수출에 이바지했다는 자랑스러움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녀 에게 그날은 ‘산업역군’의 이름이 강하게 인식된 날이 아닌, 동료들과의 모처럼의 회식자리에서 멋진 코트를 선보이고 자신의 주위에 몰려드는 남성들을 자랑하며 ‘남성들에게 매력있는' 여성의 역할을 확인했던 날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그만 큼 남성들에 시선에 의해 평가받는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남성들이 매혹되는 당신의 매력! 밝은 미소 경쾌한 기분 마치 하늘을 날아가듯... 가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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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부풀어만 가는 봄---새봄의 알찬 보람을 당신의 남영나이론과 함께...

숙녀용 속옷의 명문! 남영나이론 주식회사

<신여상 1970년 4월호 , 남영나이론 광고 문안>

그녀들이 자신에게서 삭제되었다고 생각한 ‘여성성’은 이렇게 남성들이 생각하 기에 ‘매력적’이라고 여길 ‘여성다움’에 대한 상상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 대부분 의 공장노동을 경험한 면접자들은 어떤 여성이 남성들에게 인기가 있었다고 생각 하냐는 질문에 대해 “예쁜 여자, 날씬한 몸매와 예쁜 얼굴”이라고 대답하였다. 이 는 비슷한 시기 은행과 학교에서 일했던 면접자가 같은 질문에 대해 “ 활발하고 성격이 좋은 여자”가 인기있었다고 기억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지점에 있다. 여성 공장노동자들은 남성들이 ‘매력적이라고 여길 여성’에 대해 끓임없는 자각과 재현 을 반복하면서 노동과 자신을 분리시킴으로써 자신의 ‘여성다움’을 과대 포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2. 결혼을 위한 데이트 전략

사실 미혼 여성이 가족을 떠나 도시로 임노동하러 간다는 것은 이전과 비교 한다면 상당히 파격적인 경험이었으며 이들에게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 대부분을 차지하던 저임금과 열악한 노 동조건에서 그녀들의 임노동 생활은 경제적인 독립을 가져다 줄 정도는 되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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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이러한 산업화 초기의 가장 열악한 상황에서 노동을 해왔던 여성들은 이 후 중산층이 두터워지고 세대주 남성의 수입이 상승함에 따라 산업노동에서 벗어 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이것은 노동에 시달리던 여성들에게는 축복이 라 할 수 있으며 다음세대 여성들에게는 저주스런 변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러한 가부장적 변형은 주로 경제구조의 변화에 따른 것으로 서구 가부장제의 자 본주의적 변형에서 남성의 노동은 사회적인 임노동으로 여성의 노동은 무보수 가 사노동으로 이분화되고 노동시장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중산층여성들은 부와 지위의 상징적인 지표이자 정서적인 인간관계의 전문가로서 ‘가정 전담주부’라는 특수한 형태의 삶을 영위하게 되는 것과

유사한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조혜정,

1988: 104)

여대생들 중 졸업반 학생들은 4학년이 되면서 부터 인생의 제2선택을 결 정하는 온갖 작전에 골몰하게 된다. 제2의 선택이란 “이것이냐 저것이냐” 의 인생 진로상의 실제적 활용선택을 의미한다 . 자율이든 타율이든 전공 과의 과정을 마친 여대 졸업반 숙녀들의 가는 길이란 귀결이 빤한 것으 로서 결혼 아니면 직업을 얻어 기백만원의 교육투자를 되찾자는 이상형 과 실리형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이상형이란 대학과정을 숙녀 연습 기간으로 보고 여성의 궁극적 행복은 사랑과 가정과 아이들이란 행 복론에 안주하고 싶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치원 . ‘여대졸업반 희망직업과 진단’ . <신여원 1972년 3월호>

핵가족 이데올로기가 전면적으로 대두되고 새로운 가족에 대한 구성요구들은 점차 구체적인 것으로 되어 갔다. 하지만 이전의 세대와는 이제 구혼의 방식이 달 라졌고 자신의 짝을 찾아가는 문제는 개인의 선택 또는 능력의 문제로 바뀌어져 갔다. 여성잡지들에서는 앞다투어 데이트에 성공하는 방법이나 매력있는 여자가 되는 법을 설명하고 있었고, ‘매력있는 여자도 다 자기가 하기 나름’이라며 자신을 파트너의 눈에 들게 하기 위한 노력들을 게을리 하지 말 것을 여성들에게 촉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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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었다.

데이트를 할 기회는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다. 주저할 것 없다. 그리고 데이트에 성공할 수 있는 형태는(......) 고학년이 될수록 값은 떨어져(...)어 떤 짓궂은 사람은 위의 얘기에다 보태기를 "1학년생은 금메달이라고 한다 면 , 2학년생은 은메달, 3학년생들은 동메달, 4학년생은 미안한 얘기지만 등수에도 못 든 , 조금 잔인하게 표현하면 고물차에 비교할 수 있다"고 한적이 있다. 물론 위에 얘기는 결혼 적령기가 되면 이것저것 너무 따지 지 말고 곧 결혼하라는 좋은 뜻에서 얘기한 것이리라(...0 신랑감은 내 손 으로(...) 고등 학교 졸업이상의 학력을 가진 여성을 상대로 통계를 내본 결과 , "96.2%가 신랑감은 내손으로" 라는 데에 열렬히 호응하고 있 다.(...)현명한 작전이 필요(...) 데이트에 임할 때 여성이 보여주는 태도도 가지각색이어서 위의 예로 들은 ‘잘난 체’하는 형이 있는 가 하면 , 덮어 놓고 새침만 떼는 ‘나는 바보입니다’형, 남자의 처분만 기다리는 듯한 인 상을 주는 ‘눈치 보는 형’, ’‘사랑은 쟁취하는 것이다“고 한 어느 분 말씀 이 신봉자인양 공격을 퍼부어 대는 ‘적극’형등 (...)물론 스타일에 따라 장. 단점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그 장. 단점이라는 것은 상대방 남자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고 보면, 작전(?)을 잘 세우는 현명이 여성들에게는 무엇 보다 필요하다 하겠다.(...)(편집자주: 다음 호에는 남성의 여러 가지 타입 과 데이트의 매너를 통해서 본 한국 남성을 실리겠습니다)

김 현47) “당신은 데이트에 성공하고 있는가?”, <신여상 1972년 5월호> 47) 이 글의 필자는 당시 남녀사이의 그룹미팅이나 카니발 주선 등을 하는 '하니문센터'의 대표로서 필자의 사무실에 찾아오거나 상담했던 사람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데이트 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는 현명한 작전에 대하여 조언하고자 했다.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나이가 들수록 값이 떨어지니 결혼적령기를 놓치지 말 것과 '자신 의 신랑감을 자신의 손으로' 선택하고자 하는 당시 여성들의 풍조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이성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다양한 경로 별로 분류하여 놓고 있다. 결혼에 이르는 경로 로 필자는 부모의 소개로 정혼하는 것, 다방이나 길에서 만나 사귀는 것, 학교 인맥을 통한 그룹미팅을 통해 아는 것, '허니문 센터'류의 전문적인 주선 장소를 통해 신청한 카니발이나 미팅을 통해 만나는 것으로 나누고 있다. 여기에 모자랄 것 없는 남성이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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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활동을 할 수 있는 남편감과의 데이트에 성공하여 결혼에 골인한 후 남편 은 전문적 직업활동에 집중하는 대신 집에서는 남편을 편안히 쉬게 하고 자녀를 양육하는 일에 전념하는 가정의 관리자로서의 여성의 역할이 가장 이상적인 것으 로 대두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데이트 - 곧 연애걸기-는

경제생산자인 남성이

자신을 편하게 해줄 적합한 배우자를 모색하고 여성은 자신의 적절한 부양인을 모색하는 과정이었다. 좋은 신랑감이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자원을 가진 사람과 거래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지,

그러한 좋은 신랑감을 구혼하게 만드는 것은 무

엇일지 여성들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제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연애걸기와 구혼 의 매카니즘 속에서 여성은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 지를 여성잡지는 가르쳐 주고 있었다.

꽈리양 : (잡지를 보며)여대생의 결혼관! 꽈리양 :나하고 비슷하구나 어머니: 그래 어머니: 너는 어떤 신랑을 희망하니 ? 혹시... 어머리 : 회사 총각중에 있냐? 꽈리양: 아뇨! 현재 사귀는 이는... 꽈리양: 공무원이에요 어머니: (놀라며)구체적으로 말해봐 꽈리양: (꿈꾸는 표정으로 )전 외교관의 아내가... 어머니: 영감! 꽈리가 지금도 그 남자와... 아버지 : 외부부에 다니는 박참봉의 아들 말이군 아버지 : (집을 나서며 ) 외교관이라 좋지! 좋아 아버지 : 박참봉 !댁의 총각아들 어찌 지내오? 박참봉 : 그녀석...

난 척'하다가 혼기가 늦어진 교훈을 들며 그런 류의 '과대망상증적'인 증세는 여성에게 더 많으니 주의 할 것과 상대의 스타일에 따라 작전을 잘세우는 현명한 여성이 될 것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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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참봉: 상관의 신임이 좋아서 국장들이 붙들고 놔줘야지 박참봉 : 그래서 제주도에도 못나가 봤우다 아버지:( 실망하는 표정으로 돌아오며) 얘! 알고보니 내교관이더라 꽈리양: (놀래서 뒤로 넘어진다)

< 김경언, 연재만화 ‘꽈리양’, 신여상 1970년 6월호>

낭만적 사랑에 대한 기대 속에 젊은 남성과 여성은 더욱 남성적이고 여성적 으로 되기 위하여 노력하고 연애의 상대 궁극적으로는 적합한 결혼 상대자를 찾 아 헤매게 되었다.

결혼으로 완결되는 낭만적 사랑에의 기대는 서로의 이성간의

매력에 대하여 개인적 관심을 집중시켰고 이에 따라 남녀의 태도 및 외모상의 차 이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조되었다. 현대적 성 역할 분업에 맞추어 경쟁적인 일터 에서 일을 해야 하는 남성은 그러한 일에 맞는 ‘지배적이고 강하며 박력 있고 이 지적이어야 한다’는 가치 규범적인 제한을 받게 되며 반면에 정서적이고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할 여성은 ‘유순하고 연약하며 민감하고 감성적인 것’을 여성적인 것으 로 규정 되게 된다. 이들에게 매력적 인간이란 자신의 성에 규정된 대로의 특성을 많이 가진 사람이며 이에 따라 남성의 남성다움 여성의 여성다움의 정도가 개인 의 정체성 확립의 본질처럼 간주되게 되는 것이다.(조혜정 1988: 104-106) 따라서 이 시기의 미혼 여성 공장노동자가 국가가 재현하는 공식적인 영역에서의 근로여성에 대한 지위부여로 읽힐 수 있는 산업전사라는 비성적 주체로서의 이미지나, 전통적인 여성 주체로서의 책임감 있는 딸로서의 이미지를 그려가고 있었던 반면 , 이 와는 별개로 여성 잡지 등의 대중 매체를 통해 여성은 ‘예비 신부’로서 재현되고 있었 다 . 이제 여성 공장노동자들도 결혼 및 가정 형성과 관련하여 ‘여대생’에게 뒤쳐지지 않 도록 자신의 여성성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방안들은 찾아야만 했으며가고 이는 서구 근대의 여성성을 특징짓는 근대적 소비체험과 연관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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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매력은 메가톤급입니다. 당신은 빨리 결혼에 골인할 수 있습니다. 그이가 결혼을 재촉했다면 그것은 당신의 매력적인 다리의 위력입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항상 그이는 당신의 각선미에 만족해 합니다. 안나스타킹을 선택하신 당신 또한 더욱 두다리의 미에 자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안나스타킹 광고문안” <신여성 1970년 4월호>

이러한 잡지 등의 대중매체를 보고 들으며 여성 공장노동자들은 자신의 다리를 돋 보이게 할 스타킹과 남성을 매혹시킬 수 있는 나이론 속옷을 사는데 돈을 쓰기 시작하 였으며, 상대 배우자감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한 내면과 외모의 연출법과 그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함락시킬수 있는 데이트 전략에 대한 연구에 돌입하게 되었다.

K씨 양장점에서 직접 옷 모양을 디자인해주는 주인 아저씨가 있었는데... 난 그 사람말을 100% 믿었지... 아저씨가 옷그림을 그려서 보여주었거든...그 아저 씨 말대로 옷을 해 가지고 입으면 다들 한마디씩 했거든 ..예쁘다고 .음 대 부분 그때 옷들은 몸에 착 달라붙는 원피스 정장 같은 스타일이 많이 있었 고.. 공장근처에 있는 싸구려집이 아니라 시내에 있는 유명한 집이었는데.. 약간 비싸도 옷은 잘 나오니까...요즘하곤 다르게 직접 옷을 보고

사는게

아니니까 믿지 못할 집이면 옷이 나올 때 까지 내내 불안하지 J씨

친구들이 경치 좋은 곳을 놀러갈 수 있게 가르쳐주고 했어요 태종대나 울진 같은 곳으로 ... 그리고 내 친구 중에 점도라고 연애 아주 잘하는 친구가 하 나 있었는데요.. 그 친구가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많이 가르쳐 주고 그랬 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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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데이트 하러 갈 때 입을 옷도 빌려주기도 하고...남자가 뽀뽀하자고 하 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도 알려주고 ...그 친구가 우리 공장에선 연애대장 이었거든요(웃음)

작업장과 노동과정의 남성적 규율과 문화는 여성공장노동자들이 에로틱한 성적 주체라는 사회의 요구에서(장래의 배우자가 될 남성들의 요구에서) 일단 벗어나 있는 비성적인 주체로 그녀들을 위치시켰으며 또한 사회적으로 성적인 조롱과 ‘공순이’라는 경멸은 바람직한 신부감의 자격인 여성다움의 상실과 관련하여 이해되었다. 하지만 그 렇다고 해서 보다 나은 신랑감을 잡기 위한 그녀들의 시도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상향결혼을 위한 결혼 시장에서 자신의 매매가치를 한 단계 더 높이기 위하여 여성 공장노동자들은 공장과 그 바깥을 격리 시켰으며 그들이 공장에서 하는 노동에는 무성 적인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들은 공장의 문을 나서는 순간 공장의 작업복은 벗어던지 고

대중매체에서 재현되는 여성성을 더욱 더 열광적으로 모방하면서 자신의 상실한/

훼손당한 여성성을 복원시켜 나갔다. 상대배우자감을 굴복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국가와의 관계에서는 주어 지는 ‘산업역군’이나 유교적인 가족 가치에 기반한 ‘책임감 있는 딸’로서의 호명이 아니 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안나스타킹이 잘 어울리는” 매력적인 다리와 가끔씩은 양 잠점 주인이 선전용으로 새로운 옷본을 모델 삼아 입힐 정도로 폼대있는 몸매의 소유였다. 그리고 이것의 적절한 연출과 과시를 통해 자신의 “매력을 메가톤 급으 로 만드는 것”이

‘‘그이’가 결혼을 재촉하게 만드는“ 최고의 전략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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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사랑받는 아내로 살아가기 : 상향결혼 중심으로 1. 계급 상승의 의지와 가능성 : 신데렐라의 꿈

국가는 사적 영역에서의 성별 분업 원리를 공적 영역에 확장시키는 성별화된 노동 을 근대화 프로젝트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루어 냈다. 여성들은 중상층의 사무직(여 성들의 노동이라고 분류 되어 있는, 따라서 사회 문화적인 여성성에 적합한 노동들)에 배치되거나 경공업, 방직업 중심의 노동에 미혼 여성들을 참여시켰고 기존에 사적 영 역에서 여성의 일로 규정되는 가사와 육아노동, 그리고 남성가장의 정서적 안정을 공 급해주는 감정노동이라는 젠더 이미지는 공적 영역에서 성별화된 노동으로 확장되었으 며 여성은 주변적, 보완적 노동에 배치하였다. 이렇게 성별화된 노동이 정착되고 시행 될 때 여성들의 내면과 외모는 남성배우자의 욕망과 시선에 따라서 가꾸어지도록 되었 으며 미혼 여성노동자들의 경우 결혼(가족구성)으로 집안에 안주하여 집안의 가사노동 을 담당하는 것이 정상적인 여성의 역할로서, 정상적인 여성다움을 지닌 것으로 강제 하는 사회 문화적 기제가 작동하였다. 이러한 구도 하에서 여성공장노동자들에 대한 사회 문화적 호명(공순이)은 성별분 업 구조의 심리적 기초를 마련하는데 있어서 이들이 일종의 타자로 설정되었다. 즉 공 순이가 아닌 여성들에게는 지배적인 여성다움-내면에서는 교양 있고 외면에서는 아름 답고 섹시한 여성-매력적인 신부감의 조건-을 더욱 견고하게 내면화하게 되고, 가정주 부들에게는 자신의 정상성-사랑받는 아내-을 확인하게끔 유도하는 타자이기 때문에, 공순이라는 사회 문화적 기호는 여성들이 현숙하고 아름다운 아내, 오피스 레이디, 숙 녀, 그리고 여대생이라는 호명을 공업화 과정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성별분업 체제에 적합한 심리적인 정체성으로 인식하는데 필요한 타자로서 기능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공장노동자가 취할 수 있는 생존전략은 무엇이었는 가? 그 중 하나의 관점이 이 시기 여성공장노동자들이 자신의 일과 노동의 정체성을 가족부양의 가치와 가족주의적 담론으로부터 구성해내었다고 한다면, 다른 하나는 계 급 상승을 위한 가장 유리한 확률의 게임인 결혼시장에 뛰어들어 완전히 새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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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여성 공장노동자들이 새롭게 구성하길 열망하였던 ‘그 가족’이란 것은 과 연 무엇일까? 그것은 그녀들의 삶의 탈출구가 되어줄 수 있었을까? 박정희 정권은 정 권의 태생적 한계를 무마시키기 위하여 근대화 프로젝트를 실시하면서 이와 더불어 이 러한 압축적 근대화프로젝트에 대한 충격을 흡수시키기 위하여 전통의 복구라는 이름 하에 새롭게 가족주의를 부활시키게 된다. 그녀들이 결혼을 생각하던 그 시기에 근대 화 프로젝트와 근대 가족의 형성은 그렇게 엇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흔히 여성의 직장생활은 결혼에 의해 그 기간이 결정된다고 한다. 여 성이 직업을 가지는 것은 결혼할 어느 시기까지의 여가시간을 유효적절 하게 활용하려는 하나의 수단인 것이다. 기항지 - 이렇게 표현하는 게 지 나칠지는 모르나 여성의 직장생활은 언젠가(그것도 빠른 시일 안에) 떠나 야 하고 그것이 필연적인 사실로 인식되고 있다. 즉 떠난다는 대전제 하 에 기항을 할뿐이다.(...)더욱이 때가 되어 직장생활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 경우 , 진심으로 웃으며 작별인사를 나눌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브레이크를 원만히 처리하는 테크니크가 필요할 것이다. 따라서 이 테크 니크는 오랜 직장생활을 통해 몸에 배게 되는데 대부분의 여성이 그것에 익숙하기 전에 <그만두기>마련, 결국 유종의 미를 거두기란 지난한 일에 서도 지난한 일이라 할까.(...) 이왕지사- 한 번 몸을 던진 이상 말을 남기 거나 후회하지 않을 생각누군들 없을까만 그러면서도 계속 강조 하는 게 바로 그 흔한 결심 . 여성이 직업을 가질 필요는 있으되 오래 하지는 말 라고 누가 말했던가.

정양희. “창구는 내 젊음의 항구”, <신여상 1970년 4월호>

여성공장노동자들의 ‘여성다움’에 대한 대응 방식은 국가와 남성들이 적응기제로 서 마련한 새로운 가족구성의 길이었고, 이는 근대화 프로젝트와 근대가족의 형성에 있어 성별분업이 역설적인 방식으로 완성되는 길을 의미한다. 근대화 프로젝트의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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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에 따라 새로운 직업적 전망을 가진 남성들이 급속하게 자신의 지위를 획득하 는 과정에 동참함으로서 ‘그’들의 신분상승과 계층형성 과정에 한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가고 있었다. 이것은 그들이 결혼 이전의 삶에서 오빠나 남동생을 키워나갔던 것처럼 ‘재목’이 될만한 남성의 부양을 통한 동반상승을 꿈꾸 는 것이었다. 이것은 결혼을 통한 한 남성에의 의존이라는 이성애적 결혼을 통해 성장이데올로기가 주입한 빠른 성취를 조급하게 얻으려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이 것은 보편화된 가부장적 문화권내에서 빈곤화의 길을 겪어온 여성공장노동자들에 게는 아주 효율적인 선택이었으며, 여성공장노동자들이 거친 공장노동환경속에서 ‘여성’이기 때문에 당하는 지위 격하보다는 이같은 결혼을 통한 한 남성에의 의존 은 더 나은 선택이었다.게다가 ‘여대생’이 이상적인 예비신부로 표상화가 됨에도 불구하고 , 아직 결혼시장에서는 수많은 남자대학생과 그에 비해 극소수인 여자대 학생사이의 불균등으로 인한, 그 외의 여지를 채울 수 있는 ‘좋은 혼처’의 빈자리 가 있었다.

S씨 더 이상은 공장일을 하지 않고 좀 편안한 생활을 하고 싶었어... 돈많은 사 람으로 배필감을 만나서 결혼하는 것이 나에겐 유일한 돌파구였다고 할까... 그래서 데이트를 하게 된 사람이 공장에 실습생으로 온 대학교 졸업생이었 어... 사실 처음 그 사람은 나같은 작업장의 선머슴아한테는 관심이 없었 을꺼야 ... 기껏해야 같이 실험실 안에 있는 여자들이나 보고 그랬겠지 ... 그 사람이 정말 우리들 사이에서는 정말 인기가 좋았었거든 ... 그래서 처음 그 사람이 나를 처음 본 것은 공장일 끝나고 옷 갈아입고 나가다가 였을꺼야...내가 그때는 가끔씩 양잠점주인이 선전용으로 옷을 모델삼아서 입히고 할 정도로 몸매가 괜찮았었거든 ...내가 입으면 딴애 들도

따라

입으니까...만날때면 양장점에서 맞춘 제일 예쁜 옷을 골라서 있었지... 그 사 람이 나랑 같이 다니는게 챙피하면 안 돼잖아. 무식한거 탄로날까봐 항상 말조심을 하였지..

대학생과의 데이트 경험과 ‘공돌이’들의 구혼 사이에서의 선택은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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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모두가 이러한 선택지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상향결혼을 위한 게 임의 장 속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이들은 우선 좋은 혼처의 빈자리를 감지할 만 한 ‘욕심’이 있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양장점 주인이 모델로 삼을만한 ‘육 체’와 무식함이 탄로날까 항상 말조심을 할만한 ‘머리’를 갖춘 이들이었다. 이들은 당시 남자들이 바라는 예비신부의 덕목이 무엇인지 빠르게 간파해 나가기 시작했 다. 당시 널리 퍼져 나가는 낭만적 사랑에의 기대는 이성간의 매력만으로도 완결 될 수 있는 것이었고 , 매력적 인간은 자신의 성에 규정된 대로의 특성을 많이 가 진 사람으로 간주되어 졌다. 이에 따라 여성의 ‘여성다움’을 극대화시키는 것은 여 성공장노동자들이 품게 된

‘신데렐라의 꿈’을 이루어줄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그

위치를 확고히 하게 되었다. .

2. ‘레이디’가 되는 길: 남편의 성공을 내조하는 현모양처

70년대 이후 여성의 활동범위는 점점 더 좁아지게 되면서 ‘남편하나’에 의존하 는 ‘가정주부’의 집단은 점차 확고히 형성 되게 되었다. 일제시기를 거쳐 형성된 현모양처 이데올로기는 낭만적 사랑을 강조한 ‘사랑 받는 아내 성공하는 남편’의 형태로 발전하였으며 이제 여성들은 가정으로 돌아가는 것이 정상정인 경로라는 담론을 매스컴은 유통하기 시작했다. 이제 남성들은 자신의 수입으로 당당히 권위 를 행사할 수 있는 자리를 원했으며 그러한 가정은 남성에게 의존적이면서도 자 신의 성공을 내조할 수 있는 여성을 자신의 배필로 맞아들이면서 가능해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는 남성들이 바라는 아내의 모습이 ‘교양있는 여성’이었다는 것이 다.

가난으로 인해 제대로 된

교육과정을 이수 할 수 없었던 여성들이 대부분이

었던 공장노동자들은 자신의 ‘교양’에 대한 끓임없는 의심을 품게 되고 결혼의 성 공을 위한 또 한번의 변신을 시작하게 되었다.

K씨 1973년 4월에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남편이 천석꾼 만석꾼이라기에 그런 줄 믿었지... 그렇게 사랑했다고 난 생각하지 않아 .. 아니 사랑한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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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었어 결혼하면 집도 자동적으로 생기고 여유로운 생활이 될 것 같았 고 ... 그렇게 지주집안이니까 우리 집안도 일으킬수 있고 ...11년 동안 공장에서 일해왔는데 그건 정말

놓칠 수 없는 기회지.. 근데 문제는

나의 이른 가출과 여공생활을 시집식구들은 이해를 못한다는 거야 ... 그래서 할 수 없이 시집의 식구들한테는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그저 집에 서 신부수업이나 받고 있다가 친척 아저씨가 중매로 연결시켜 준 것으로 말을 맞추기로 했지.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지적인 여성, 남편을 성공시키는 교양있는 여성이 이제 는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라고 말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적 사조는 여 성잡지들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여성 중앙>의 1970년 1월호의 창간 사에서는 새로운 교양과 신선한 지혜와 합리적인 생활방식을 소개할 것이라고 그 목적을 기술하며 지적인 여성의 교양과 생활정보를 게재하여 아름다운 여성 .행복 한 가정을 추구하는 잡지하고 밝히고 있었다. <여원>은 1955년 10원호의 창간사 에서 “여성의 문화의식 향상을 위하여 ”라는 제목하에 모든 여성의 지적향상을 꾀 하고 부드럽고 향기로운 정설을 부어드리며 새로운 시대사조를 공급코저 한다고 밝힌 바가 있었으나, 1974년 8월에는 20세 이상 결혼 적령기의 여성에서부터 국민 하교 저학년을 둔 젊은 아내까지를 중심적으로 취급하여 남편의 성공이 가정의 행복임을 실증시키는 국내유일의 여성지라고 그 새로운 지향점을 구체적으로 밝 히고 있다. 1965년 4월에 창간된 <주부생활>은 잡지의 제호자체에서 이미 주부를 위한 내용이라는 특성을 간파할 수 있으며 주부들의 교양을 함양하고 현대생활의 건전한 취미 오락을 보급하여 가정생활의 명랑화에 기여한다고 그 성격을 제시하 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여성잡지들은 제대로 된

교육과정을 이수 할 수 없었

던 여성공장노동자들에게는 자신의 ‘교양’을 함양할 수 있는 중요한 참고자료이자 도달해야 할 목표에 대한 기준이 되어 주었다.

요리 그것은 현대여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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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기본적인 교양입니다.

%수시 입학할수 있음 %초보자 환영 본과 3주완성

사단법인 한국식생활 개발연구원 새나라 가정요리 학원

“새나라 가정요리학원 광고문안” , <신여상 1970년 4월>

‘현대 여성’이 갖추어야 할 기본 덕목들이 계속적으로 추가되었다. 일에 지친 남편을 위한 특식을 만들어 내는 것에도 능숙해야 했고 옷본만으로도 아이의 나 들이 옷을 만들어 내야 했다. 결혼을 이루어 내기 위해 자신이 극대화시킨 ‘여성다 움’을 , 자신의 결혼을 가능하게 만들어주었던 아름다움과 섹시함을 , 이제는 현숙한 아내라는 결혼과 가정형성에 대한 ‘여성성’들로 대체시켜 나가야 했다. 그리고 빠듯하 지만 자신의 몸에 투여되었던 소비는 결혼과 함께

풍족하고 우아하지만 가족을 위한

소비로 바뀌어 갔다. 이제 ‘나’라는 말대신 ‘우리 집’ ‘우리 애기’라는 말들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비타엠 가족 우리집의 건강법 73 -신선한 공기와 햇빛 기봉균씨 가족( 전 재무부 장관)

중책을 맡으신 위로는 항상 시간에 쫓기는 바쁜 생활을 하시는 남편과 한창 자라라 고비에 있는 세 아이의 건강을 도맡은 나는 틈만 있으면 영양학에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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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서적을 뒤적인다. 부득이 외식을 많이 하시게 되므로 집에서 하시는 식사 때에는 영양이 한편으로 치우치는 일이 없도록 식사관리에 특히 세밀한 마음 을 쓴다. 한편 아침 일찍 온가족이 마당에 나와 신선한 공기를 듬뿍 마시며 간단한 체조를 하는 일도 우리 집의 건강 관리법의 하나이다 신성한 공기와 햇빛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영양식이니까

고단위 영양제 비타-엠 (글. 아내 이소정)

“비타엠 광고 문안”, <여원 1968년 7월>

우리 애기도 서구식으로 튼튼하게 키우고 지능지수를 높이자

새 시대의 세계적인 방향 고 케네디대통령의 딸 캐로린와 아들 죤죤이 이 죠리잠파로 자랐읍니다. 조리잠파란 과학적으로 계산된 특수 고무의 사용으로 애기의 미세한 동작에 도 움직이기 때문에 애기가 하루정인 유쾌하게 잘 놉니다. 따라서 식모가 필요없고 엄마는 안심하고 식사와 기타 가사에 전념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우리 애기는 밤낮으로 눕거나 또는 엄마의 품에서 폐쇄적으로 자랐기 때문에 운동부족과 기능저하를 초래했습니다. 이 죠리잠파는 과학적이고 능 동적인 육아기구로 자율적인 운동 신경의 발달로 골과 근육이 경이적인 발육 으로 인해 지능지수는 물론 튼튼한 체력으로 자라며 기지는 밤에 깊은 잠을 자고 식용이 왕성하여 어떠한 명에도 이기는 건강한 애기가 됩니다. (이상의 글은 전부 의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죠리잠파 완구 광고문안, [여원] 6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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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남편이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영양학에 대한 책들도 뒤적 여야 하고 아이들은 서구 적인 방식으로 키워 지능지수도 올려야 했다. 그렇게 하면 재클린 여사 못지 않는 우아한 숙녀가 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의학적인 근거’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식한 여자로 윽박질러졌다. 이제 식모라는 존재가 가사노 동을 대리하는 존재로서 전업주부의 정체성에 현실적인 영향력을 미치기에 식모를 폐 지해야 한다는 이야기 까지 나타났다. 여성지도자들은 중산층 주부들의 시간은 자녀 양육과 교육을 위한 시간으로 쓰여져야 하는데 식모의 존재는 이러한 방향으로의 실천 에 있어 방해꾼이기 때문에 없애야 한다고 고 주장했다. 식모들이 주부들의 본분을 망 칵케 하여 근대적인 전업주부의 형성을 저해 한다는 것이었다.(신건, 2001 : 83면) 여성잡지의 목차들은 “ 데이트는 어떻게 성공하는가”(신여상 1970년 4월호) 에서 급격하게 “우리엄마 간식이 최고” (여원 1976년 7월호)라던가 “ 레저를 즐기는 교양가 족들”(여원 1976년 9월호)로 바뀌어 갔다. 권두의 칼라 화보48)에는 신사임당 탄생 472 년 기념으로 현숙한 어머니를 선발하는 대회의 기사들이 몇 장이나 자리를 차지하였 다.

U씨 내가 제일 자랑스러운 것은 책을 끓임없이 읽었다는 거야... 결혼 나고 나서 도 문화센터에 나가서 시쓰는 법을 배우고 틈이 날 때마다 시를 써보곤 하거 든...만약 나에게 문학이라는 것이 없었다면 난 아마 예전에 공장에 같이 다 니는 애들하고 똑같이 살고 있을꺼야 ... 하지만 난 개네들하고는 다르거든.. K씨 결혼하고 나서 아이들도 키우고 나니까 막상 할 일도 없고 그렇다고 내가 특별히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친구가 운영하는 공장에 일을 도우러 나갔었거든...

그곳에서는 사장 친구니까 다들 '사모님'‘사모 님 ’

하더라고 ... 근데 그 소리를 들어가며 일을 하는데도 여전히 그 공



문을 들어설 때면 '이러다 공순이 시절로 돌아가는 것은 아닌지 불안 해 져 ... 거기 일하러 나오는 사람들 다 천박해 죽겠거든 ... 어쩜 그렇게 말 하나를 해도 못 배운 티를 내는지.... 그래서 난 차라리 책을 들고 다니시

48) <여원> 1976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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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서 쉬는 시간이나 , 점심시간되면 그런 사람들하고

이야기 하는 대신

책을 보는 거야... 그런 사람들하고 쓸데없는 말하느니 그게 훨씬 낫지

그녀들이 스스로 인식하는 있는 ‘교양있는 아내’ ‘정상적인 여성’과의 거리는 교 양에 대한 강박의 형태로 나타났다. 자신이 다양한 매체들에서 나타나고 있는 바 람직한 아내와 엄마가 되기에는 무엇인가 모자란 것들이 있다는 생각과 언젠가는 자신의 본질이 탄로나서 모든 것이 망쳐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공장시절의

동료들과는 연락을 끓고 그때의 기억은 없었던 것으로 만들며 자신만의 성을 쌓 아가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들에게 공장의 기억은 삭제되어 진 것이다.

S씨 이제 는

더 이상 밝은 불빛이 없이는 글자가 어른거려 도저히 책같은

걸 볼 수가 없어... 몇 년전에 안경점에 들어가 '아무거나 돋보기 하나 주세요' 라고 말하는데 내가 할머니가 다되었나 싶어서 챙피해서 말도 잘 안나오더라고... 또 이제는

예전처럼 굽이 높은 신발을 신을 수 없

지... 조금만 걸어도 말이 아파서 힘들거든 ... 이런 신발(나즈막하고 굽이 평평한 신발)을 '여포'신발이라며 하거든 여자이길 포기했다는 뜻인데 ... 알고 있나?

성공적이었던 여성 공장노동자들의 짧은 로맨스는 사라져 갔다. 그녀들이 꾸었던 신데렐라의 꿈은 이제 ‘가만히 누워서 조국을 생각하라’는 빅토리아 여왕의 첫날발을 위한 교시처럼 ‘가만히 누워서 가정을 생각하라’는 교시로 바뀌어져 갔다. 낭만적인 사 랑에 몰두하였던 짧은 로맨스는 결혼으로 가기 위한 단막극으로 끝나고, 연극은 성공 하였지만 그 순간 그녀들은 더 이상 여자가 아닌 주부가 되었다. 그녀들의 생존 전략이었던 결혼을 유지하기 위해 ‘사랑받는 아내로 현모양처로’60 변신한 여성 공장노동자들은, 남성주변의 생활 구성자로의 역할을 성실하게 해내 는 , 어쩌면 그렇게 혐오하던 ‘공순이’와 마찬가지로 또 다른 형태의 무성적인 존재가 되어 갔다. 그녀들이 택한 새로운 가족 구성은 자신들을 여전히 무성적 존재로 되어가 도록 만들었다. 또한 자신의 이름이 아닌 가족의 이름으로 남아있게 하였다. 그녀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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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의 꿈은 그렇게 근대화 과정과 근대 가족 형성이 엇물려 역설적으로 돌아간 한국적 상황만큼이나 그녀들의 삶에서 역설적으로 다가오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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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장 분석 및 종합

1절

미혼 여성공장노동자의 여성성

근대화 프로젝트 과정에서 작업장의 배치가 성별 영역 지정의 형태로 나타났 다고는 하지만, 1960, 70년대 여성공장노동자가 실제 공장에서 해야 했던 일의 성 질은 전혀 ‘여성적’인 형태의 작업이 아니었다. 이러한 여성공장노동자들의 거칠고 힘든 작업의 통제는 군대의 체제는 모델이 되어 조직적으로 관리되어 졌으며, 여 성공장노동자들은 공장노동자들이 겪어야 했던 일반적인 지위하락뿐만 아니라 여 성성(feminity)에 대한 공격까지도 받아야 했다. 사람들에 의해서 말하여 지던 “ 여자는 행동을 조신하게 하고 .. 여자 목소리는 담을 넘어서는 안되고 ..” 와 같은 ‘ 여자는...’의 담론에 공장노동은 도무지 부합될 수가 없었으며, 그러한 ‘여성다움’ 을 유지한다는 것은 공장일을 그만두겠다는 결심이 없고서는 사실 불가능한 일었 다. 미혼 여성공장노동자들은 ‘아버지’나 ‘오빠’와 같은 남성 주체에 의한 보호의 역 할이 작용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바라보아졌으며, 동시에 공장노동에 종사하고 있 다는 것은 그러한 보호로부터 일시적으로 ‘방치’되어 있는 상태라고 생각되어졌다. 정상적인 여성의 일에서 벗어나 비정상적인 상태로 노동하고 있다는 주위의 동정 어린 시선들은 그들이 감내하고 있던 현실의 노동조건과 맞물려 여성 공장노동자 들에게 더욱더 자신의 일에 대한 자신감을 잃게 만들었으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에 대하여 회의를 품게 만들었다. 노동의 내용과 성격에서 이미 ‘여성다움’에 대한 위계는 설정되어 있었으며, 남 성 동료들과의 관계에서도 여성 공장노동자들은 자신의 여성성 (feminity)에 대한 자신감을 잃고 있었다. 단정하고 말끔한 용모로 조신하게 움직일 수 있는 사무직 여성의 일은 -설사 그것이 남성들의 일을 보조하는 극히 수동적인 노동형태임에 도 불구하고 그러한 평가와는 전혀 상관없이- ‘여성다움’을 최대화 할 수 있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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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평가되었던 반면에, 자신들의 일은 ‘선머슴아’ 같은 일이며 그런 일을 하는 자신은 여성으로서 남자들의 시선을 끌만한 ‘자격’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다는 생각 이 체험적으로 형성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이 가지고 있는 경제적, 문화적 자원에 따라 특권적인 위 치로서, 여성의 ‘미’를 대표하는 표상으로 떠오르게 된 여대생 집단과의 비교는 ‘여 공’의 자리를 더욱더 볼품없게 만들었다. 여대생과 ‘공순이’ 사이의 엄청난 거리는 그 하나는 여성이 달해야 할 하나의 지표로서 또 하나는 ‘망쳐진’ 현실로서 나타나 고 있었으며, 여성공장노동자들은 가난해서 배우지 못했고, 그래서 무식하며, 그 결과 자신은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이 그녀들이 발견한 결론이었다. 이러한 위계에 맞서 자신의 긍정적인 정체성을 형성시킬 만한 언어들을 한국 의 여성공장 노동자들은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조국근대화라는 국가적인 목표를 위하여 동원된 민족주의적이고 가족주의적 발전주의적인 수사들은 공장노동자들 이 일상적인 노동생활과 사회로 받는 대접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국가 에 의해서 제공된 타의적 정체성으로서의 ‘산업전사’라는 허황된 이미지와는 달리 여성 공장노동자는 198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미천하고 경멸할만한 대상으로 여겨졌으며 ‘공순이’라는 냉소적인 언어로 불리어졌다. 더구나 도시에서 주변화된 여성공장노동자들의 공적공간은 ‘성적인 방종’과 동 일시되었다. 사회적 관심과 보호를 받지 못했던 여성들, 예컨데 도시의 개인 가정 집 식모나 버스 여차장 그리고 저임금의 생산직 노동 여성들은 언제라도 밤거리 의 여성이 될 수 있다는 요보호의 대상으로 떠오르게 된다. 미혼 여성노동자들이 하층계급의 팜므 파탈로 간주되어 도시의 정상적인 중산층 가족에게는 위협적인 존재로 그려지면서,

이 시기의 ‘가정’이라는 것은 ‘거리의 여성’과 ‘정숙한 여성’을

나누는 공간적인 경계로서 기능하게 된 것이다. 강력한 ‘아버지’ 또는 ‘오빠’로부터 일상을 관리 감독받지 못하고 ‘정상적인 가정’으로부터 유리되어 있는 여성 공장노 동자들은 이미 성적으로 보호받지 못한 , 또는 보호해야 할 가치가 없는 ‘이미 내 둘려진’ 또는 ‘깨진 그릇’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여전히 순정과 순결이 여성의 필수 덕목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던 시절, 가정의 보호는 거리의 여성과 정숙한 여성을 나누는 기준으로서 설정이 되었고 여성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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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노동자들은 정신적 , 신체적인 여성성의 결핍과 더불어 도덕적인 여성성까지도 결핍된 대상으로까지 판정되게 된다.

2절

‘여성다움’ 의 회복 방식

미혼 여성공장노동자들이 자신의 훼손당한(혹은 훼손당했다고 믿어졌던) ‘여성 다움’을 회복시키는 작업들은 바로 공장의 바깥에서 이루어졌다. 공장에서의 노동 으로 그녀들의 여성성이 강하게 공격받고 있는 만큼 공장 바깥에서의 ‘여성다움’ 회복의 전략도 강력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들의 기본적인 전략의 방향은 일단 공장의 노동과 자신을 분리시키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좀 더 적극적인 방식은 학 력을 높이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많은 여성노동자들은 자신이 공장에서

여성스럽지 못한 일을 하고 있는 근본 이유가 바로 ‘교육’때문이라고 생각했기에 장시간에 힘든 노동 후에도 악착같이 교회나 사설학원, 야간학교에 다녔다. 사실 이런 노력들은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기보다는 심리적. 정서적인 것이었지만 나중 에 더 좋은 결혼 상대를 만나기 위한 투자로서 한자 꽃꽂이 요리 같은 문화적인 기술을 배워두려는 시도는 계속되었다. 미혼 여성공장노동자들이 자신에게서 삭제되었다고 생각한 ‘여성성’은 남성들이 생각하기에 ‘매력적’이라고 여길 ‘여성다움’에 대한 상상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 남성들에 시선에 의해 평가받는 여성으로서의 매력은 중요한 의미를 지녔으며, 남 성들이 ‘매력적이라고 여길 여성’에 대해 끓임없는 자각과 재현을 반복하면서 자신 의 ‘여성다움’을 과대 포장하고 있었다. 이 같은 현상은 불평등한 훈육과정과 그 가치의 내면화에 연결되어 있다. 바키 가 말한 것처럼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으로 대별되는 불평등한 훈육과정을 통해 여 성은 권력에의 자발적 복종 및 가치의 내면화 동화 동조를 하게 된다.(Bartky,s 1988: 75-81) 끓임없이 거울을 들여다보고, 비가 오면 머리스타일이 망가질까 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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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하며 ,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타킹의 올이 나가지나 않았는지 수시로 들여다보 고 , 먹는 것에 대해서도 스스로 감시하는 자기검열 자기 감독은 바로 가부장제에 복종하는 형식인 것이다. 더욱이 여성의 전형적인 신체적 긴장과 억제된 언어는 남성 지위체계 속에서 복종의 언어로 이해되기 마련이다. 이러한 열등감과 복종성 은 곧 경제적 효과를 가져왔으며 근대 경제가 여성의 지속적인 저임금에 절대적 으로 의존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복종에 기인하고 있다. 능력보다 외모에 나 신경 쓰는, 곧 결혼해 버릴 꽃이라는 평가를 여성자신도, 남성도 받아들이기 되 기 때문이다.(위의 책: 73) 이러한 ‘아름다움’의 담론은 대부분 여성의 몸에 대한 남성의 시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은 남성에게 보여짐으로써만 비로소 사회적 존재로 자리할 수 있다는 사회적 통념 및 관습 속에서(이성욱, 1993: 176), 가부장적인 남성우월문화 적 시선을 내면화하고 자신을 감시 규제의 대상으로 여긴다. 더구나 불평등한 성 별 권력관계에 기초한 사회제도 안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은 끓임없이 재생산 되는 것이다.

미혼 여성 공장노동자들이 결혼 및 가정 형성과 관련하여 ‘여대생’으로 대표되는 매 력적인 예비 신부감 들에게 뒤쳐지지 않도록 자신의 ‘여성다움’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방안들은 찾아야만 했으며, 이는 서구 근대의 여성성을 특징짓는 근대적 소비체험과 연관되어 있었다. 상향결혼을 위한 결혼 시장에서 자신의 매매가치를 한 단계 더 높이 기 위하여 여성 공장노동자들은 공장과 그 바깥을 격리 시켰으며 그들이 공장에서 하 는 노동에는 무성적인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들은 공장의 문을 나서는 순간 공장의 작 업복은 벗어던지고 대중매체에서 재현되는 여성성을 더욱 더 열광적으로 모방하면서 자신의 상실한/훼손당한 여성성을 복원시켜 나갔다. 이러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아름다움’의 추구가 소비자본주의 논리와 만남으로써 소비의 정점에 여성의 몸을 위치시키는 현상이 일어났다. 소비자본주 의적 관점에서 여성의 외모는 욕망의 기호로 제시되면 하나의 교환가치로서 소비 되는 현상에 주목한다. 보드리야르는 소비의 가장 아름다운 대상으로 육체를 말하 고 있다. (보드리야르, 1991: 190)

몸이 하나의 문화적 사실이기에 개념의 유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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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선동의 가능성이 따라붙는다. 즉 몸은 타고난 형태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원하 는 대로 디자인하고 바꿀 수 있는 대상이며 멋진 몸을 위한 자본과 시간의 투자 를 아낄 것 없다는 것이다. 즉 육체를 깊이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물신숭배와 구 경겨리의 논리에 따라 육체를 다른 사물보다 더 윤기있고 완벽하며 기능적인 사 물로서 외부로부터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사물로서 다시 되찾은 육체는 이제 자본주의적 목표에 따라 투자된다. 육체가 이윤을 일으켜야 한다. 몸은 하나 의 자산이며 사회적 지위표시의 기호형식 가운데 하나로 조작되는 것이다.(보드리 야르, 1970: 193) 몸이 경제적 수익을 올리는 경제과정의 확립을 위해서는 ‘개인’이 자신을 하나의 사물, 그것도 가장 아름다움 사물, 가장 귀중한 교환재료로 간주할 필요가 있다. (위의 책: 201)

여성지를 비롯한 각종 매체들은 육체의 재발견과 나

르시시즘적 열중과 집착을 유도하고 조작 가능한 사물로서 욕망을 코드화하고 있 었다. 상대 남성 배우자감을 굴복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국가와의 관계에서는 주어지는 ‘산업역군’이나 유교적인 가족 가치에 기반한 ‘책임감 있는 딸’로서의 호명이 아니라, 말 그대로 “안나스타킹이 잘 어울리는” 매력적인 다리와 가끔씩은 양잠점 주인이 선전용으로 새로운 옷본을 모델 삼아 입힐 정도로 폼대있는 몸매의 소유 였다. 그리고 이것의 적절한 연출과 과시를 통해 자신의 “매력을 메가톤 급으로 만드는 것”은

‘‘그이가 결혼을 재촉하게 만드는“ 최고의 전략으로 떠오르게 된 것

이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배경은 바로 일상적이고 가부장제적인 사고체계 인 것이다.

‘아름다움’은 여성이 갖추어야할 기본 덕목이 되었다. ‘아름다움’은 여

성에게 해당하는 말로 성별화되었으며, 이러한 담론에서의 남녀차별은 외적 아름 다움을 여성의 영역 여성의 의무로 남겨 놓는다. (이영자, 1997: 25) 가부장제 역 사 속에서 자기 결정권이 없이 식민화 되어온 여성의 몸은 소비시장에 의해서 보 다 더 경쟁적 공개적으로 노예화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며, 여성의 에너지를 외모에 국한시킴으로써 여성의 행위와 사고를 억압하고 최면효과를 통한 정치적 마비로 여성의 지위하락과 지속적인 저임금과 같은 결과를 낳아 가부장적 질서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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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생존전략의 선택과 여성성의 재생산 1. 미혼 여성공장노동자의 선택지

‘자신이 바라는 것’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사이의 뚜렷한 차이는 여성공장노 동자들에게 강한 ‘이탈’(Albert Hirshman, 1997)의 욕구49)를 불러일으키며 공장노 동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자신의 생애에 일시적인 단계일 뿐이라고 생각하 고 싶었다. 하지만 대표적으로 사무직 노동자가 되고 싶다는 바램조차도 그들 대 부분이 이 가지고 있던 낮은 학력으로는 도무지 이루어지기 힘든 것이었으며, 사 설 학원이나 야간학교에 다니며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학력을 높이려는 적극적 인 시도 또한 대부분의 경우 ‘성공적인 이탈’로 이어지진 못했다. 노동 현장에서의 미혼여성들이 가장 먼저 경험하게 되는 것은 독립적인 임금 노동자로서의 정체감이 아니라 부모, 형제를 위해 일하고 있다는 도덕적인 만족감 이었다.

그녀들은 가족내의 대표 주자가 될 ‘오빠’나 ‘남동생’들을 길러내기 위해

책임을 부여받았으며, 그 임무를 계속하고 있는 한 사회적인 멸시와는 상관없이 여전히 ‘착하고 책임있는 딸’이라는 호명을 받을 수 있었다. 여성 공장노동자의 수 입이 가족의 주요한 수입원으로 작용하고 있던 상황은 그녀들에게 부담감인 동시 에 힘든 노동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가 되었으며, 설사 남자들이 선망하는 매력적인 여성은 못될지라도, 행실에 대한 오해의 눈길을 받을 지라도, 사회적인 하층민으로서 조롱을 받을 지라도,

‘효’를

실천하고 있다는 자긍심 또

는 윤리적인 만족감은 순박한 여성공장노동자들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가 있 었다 . 이로서 여성공장노동자들에게 공장노동에의 참여는 가부장적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라기보다는 가족전체의 복리를 위한 것이었으며, 보다 튼튼한 가족주 의적 관계망의 형성을 위하여 가족내의 남성을 길러내는 보조적인 조력자로의 역

49)

Hirshman, Albert. 1971. Exit, voice, and Loyalty : Response to Decline in Firms, Organizations, and States . Cambridge, Mass. : Harva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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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을 다하는 가부장제 강화의 공모자가 되고 있었다. 이렇게 보편화된 가부장적 문화권내에서 빈곤화의 길을 겪어온 여성공장노동 자들에게

결혼의 선택이라는 것은 이미 규정된 삶의 방식이었다. 가부장제에 깊

숙히 내재된 성의식은 한국여성들에게서도 가장 느리게 변했으며 그 중에서도 가 장 극복되기 어려운 것은 바로 결혼에 대한 고정관념이었다. 또한 결혼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자신의 사회적 노동에의 참여와 그를 통한 사회적 기여라고 주장할 만큼 미혼 여성공장노동자가 임금노동자로서 자립할 수 있는 가능성도 희박하였 다. 자원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여성공장노동자가 독립적 임금노동자로서 자립하 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회적 보호망이 필요하였지만, 이러한 국가 사회적인 장치는 부재하여 도시정착과 구직, 생계해결, 거주 등이 모두 개인적인 해결로 귀착되게 되었으며 사적인 관계망의 형성은 그들의 생존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노동 현장과 맺는 관계가 취약할수록 사적인 의존성이 강화되고 결혼이외의 특별한 다른 신분 상승의 길이 없었다는 측면에서, 결혼을 통한 한 남성에의 의존 이라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으며 당시의 성장이데올로기가 주입한 빠른 성취를 이성애적 결혼으로 조급하게 얻으려는 모습이었다. 여성공장노동자들이 거친 공장 노동환경속에서 ‘여성’이기 때문에 당하는 지위 격하보다는 이 같은 결혼을 통한 한 남성에의 의존과 새로운 가족주의적 관계망을 확장시켜 나가는 길을 선택했다. 결혼을 선택하는 데 있어 자신의 삶이 남편의 노동계급 주변에 생활을 조성하는 의존적인 피부양자로 전락하게 된다고 생각하는 대신, 남편의 가족으로 편입되는 특혜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결혼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성별 중심의 분업에서 갈리 는 남녀의 삶을 자신의 삶에 보다 유리한 것으로 평가한 것이다. 오히려 그들에게 이러한 또 다른 가족주의적인 관계망의 형성은 생존에 효율적인 것이었으며 반드 시 필요한 플러스적인 요소로 생각되었다.

2. 상향 결혼의 경로

근대화 프로젝트의 진행에 따라 새로운 직업적 전망을 가진 남성들이 급속하 게 자신의 지위를 획득하는 과정에 동참함으로서 ‘그’들의 신분상승과 계층형성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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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에 한 일원으로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가고 있었다. 이것은 그들이 결 혼 이전의 삶에서 오빠나 남동생을 키워나갔던 것처럼 ‘재목’이 될만한 남성의 부 양을 통한 동반상승을 꿈꾸는 것이었다. 전문적 직업활동을 할 수 있는 남편감과 의 데이트에 성공하여 결혼에 골인한 후 남편은 전문적 직업활동에 집중하는 대 신 집에서는 남편을 편안히 쉬게 하고 자녀를 양육하는 일에 전념하는 가정의 관 리자로서의 여성의 역할이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대두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데 이트- 곧 연애걸기-는

경제생산자인 남성이 자신을 편하게 해줄 적합한 배우자

를 모색하고 여성은 자신의 적절한 부양인을 모색하는 과정이었다. 이상적인 예비신부로서 ‘여대생’이 표상화가 됨에도 불구하고, 아직 결혼시장 에서는 수많은 남자대학생과 그에 비해 극소수인 여자대학생사이의 불균등으로 인한, 그 외의 여지를 채울 수 있는 ‘좋은 혼처’의 빈자리가 있었다. 더구나 이전의 세대와는 이제 구혼의 방식이 달라졌고 자신의 짝을 찾아가는 문제는 개인의 선 택 또는 능력의 문제로 바뀌어져 갔다. 낭만적 사랑에 대한 기대 속에 젊은 남성 과 여성은 더욱 남성적이고 여성적으로 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결혼으로 완결 되는 낭만적 사랑에의 기대는 서로의 이성간의 매력에 대하여 개인적 관심을 집 중시켰고 이에 따라 남녀의 태도 및 외모상의 차이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조되고 남성의 남성다움 여성의 여성다움의 정도가 개인의 정체성 확립의 본질처럼 간주 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향결혼을 위한 게임의 장 속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이들은 우선 좋 은 혼처의 빈자리를 감지할 만한 ‘욕심’이 있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양장점 주인이 모델로 삼을만한 ‘육체’와 무식함이 탄로날까 항상 말조심을 할만한 ‘머리’ 를 갖춘 이들이었다. 이들은 당시 남자들이 바라는 예비신부의 덕목이 무엇인지 빠르게 간파해 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널리 퍼져 나가는 낭만적 사랑에의 기대는 이성간의 매력만으로도 완결될 수 있는 것이었고, 매력적 인간은 자신의 성에 규 정된 대로의 특성을 많이 가진 사람으로 간주되어 졌다. 이에 따라 여성의 ‘여성다 움’을 극대화시키는 것은 미혼 여성공장노동자들이 품게 된 루어줄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그 위치를 확고히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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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의 꿈’을 이

하지만 생존 전략이었던 결혼을 확실하게 성사시키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랑받는 아내’로서의 덕목의 추가가 필수적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외면적으로 아름답고 섹시 한 여성일 뿐만이 아니라 내면적으로 교양있는 여성이 좋은 신부감으로 견고하게 형성 된 것이다. ‘사랑받는 아내’는 일에 지친 남편을 위로하는 것에도 능숙하고 아이들 의 양육도 전문적으로 해내야 했다. 결혼을 이루어 내기 위해 자신이 극대화시킨 ‘여성다움’을, 자신의 결혼을 가능하게 만들어주었던 아름다움과 섹시함을 , 이제는 현 숙한 아내라는 결혼과 가정형성에 대한 ‘여성성’들로 대체시켜 나가야 했다. 하지만 가난으로 인해 제대로 된 교육과정을 이수 할 수 없었던 여성들이 대 부분이었던 여성공장노동자들은 자신의 ‘교양’에 대한 끓임없는 의심을 품게 되고, 그녀들이 스스로 인식하는 있는 ‘교양있는 아내’ ‘정상적인 여성’과의 거리는 교양 에 대한 강박의 형태로 나타났다. 자신이 다양한 매체들에서 나타나고 있는 바람 직한 아내와 엄마가 되기에는 무엇인가 모자란 것들이 있다는 생각과 언젠가는 자신의 본질이 탄로나서 모든 것이 망쳐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공장시절의 동 료들과는 연락을 끓고 그때의 기억은 없었던 것으로 만들며 자신만의 성을 쌓아 가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로서 그들에게 공장의 기억은 삭제되어 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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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장

결 론

지금까지 이 논문에서는 1960, 70년대 공업화 과정에서 미혼 여성공장노동자 들의 경험을 중심으로 하여 근대적 여성성의 형성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사이의 초기산업화과정에서 발생한 산업구조와 노동공간 의 변화 속에서, 대규모 제조업 공장으로 흡수되었던 10대 중반-20대 중반의 여성 들이 가지고 있는 노동과 생활의 경험에 대한 기억들을 통해 한국의 근대적 여성 성이 형성되어간 경로를 추적해 본 것이었다. 먼저 이 글의 3장에서는 1960.70년대 공장의 여성노동공간에 대하여 노동공간 내. 외부로 나누어 분석하였다. 그들의 공장노동의 기억은 거친 손과 강한 팔뚝, 여자군대로 대변되는 여성성을 해치는 공포의 공간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작업 공 간을 떠나 먹고 자고 쉬던 공장 밖에서의 삶에서도 ‘공순이’라는 경멸과 ‘비정상적 인 여성’이라는 시선을 느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공장노동자들은 이 글의 4장에서 보여진 것처럼 노동과 생활에서 충분히 자율적인 존재로 서지도 못한 채 사적 관계망을 도구적으로 이용하며 변형된 가족주의적 관계망을 유지시켜 스스 로 가부장적인 질서를 강화해 나가고 있다. 가족주의적인 질서를 선택한 여성공장 노동자들은 삶에서 유리한 전략이라고 판단한 결혼시장에서 매력적인 신부감이 되기 위해 공장노동으로 인하여 훼손되었던 여성다움을 극대화시켜 과대 포장하 였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결혼시장을 통한 신분상승에 성공한 이들은 ‘교양있는 주 부’라는 새로운 계급유지의 가치를 위해 자신을 다시 한번 변신시킨다.

여성 공장노동자는 공사영역에서 그들의 노동과 관련된 서로 다른 의미부여를 경 험하였다. 공적인 영역에서 국가와 기업은 이들을 ‘근로여성’으로 호명하였으며 ‘여성’ 임에도 불구하고 국가와 가족의 앞날을 위해 땀흘려 노동하는 ‘산업전사’, ‘책임감 있는 딸’로 재현하였다. 반면 생활세계에서 그들은 ‘여성다움’을 훼손 당하거나 상실한, ‘못 배우고 가난한’ 사회 문화적인 타자로서 ‘공순이’로 호명되었다. 특히 미혼 여성에게 좀 더 여성스러운 일로 여겨지는 공적 영역의 성별화된 노동(회사원의 노동)이 아닌 것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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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의미화 되는 공장노동은 이들에게 자신의 여성다움을 상실하게 하거나 훼손시키는 상징으로 경험되면서 노동과 여가를 분리해내는 방식으로 그들의 일과 노동을 주관적 으로 의미화한다. 노동 작업장의 남성적 규율과 문화는 전체적으로 여성성의 훼손이라 는 인식으로 받아들여져서 공장은 남성적 영역으로, 그리고 공장 바깥은 자신의 여성 다움을 다시 찾을 수 있는 영역으로 의미화하였던 것이다. 작업장과 노동과정의 남성적 규율과 문화는 이들이 에로틱한 성적 주체라는 사회 의 요구에서(장래의 배우자가 될 남성들의 요구에서) 일단 벗어나 있는 비성적 주체로 위치시켰으며 국가담론의 재현에서 보여지는 바 산업전사라는 상징적인 지위 부여로 인해 남성노동자들과 현실적으로 동등한 입지를 확보한 것은 아니다. 여성 공장노동자 들은 성적인 낙인과 착취 그리고 사회적 경멸(공순이)을 여성다움의 상실과 관련하여 이해한다. 공장 안과 밖에서 이들에게 강요되는 역할 규정은 국가와의 관계에서는 비 성적 주체(산업역군, 산업전사)이면서 동시에 유교적인 가족 가치에 기반한 책임감 있 는 딸들이었다. 반면 대중매체에서 재현되는 여성성 (교양과 외모, 에로틱한 존재)은 여성공장노동자들과는 긴장관계에 놓여 있었으며 이들은 상실한/훼손당한 여성성이라 는 지배적인 인식에 의해서 공장과 그 바깥을 격리시키고 공장 바깥에서 상실된 여성 성을 되찾으려고 대중매체에서 재현되는 여성성을 모방해 간다.

이 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초기 산업화 단계의 여성공장노동자들은 가부장제 변화의 과도기적 단계에 놓여 있었다. 평균적으로 60년대 중반에 10대 중반의 나 이로 공장노동에 종사하였던 이 여성들은, 건국 전후에 태어나 6.25 피난민 시대에 유년시절을 보내면서 전통적인 신분 의식과 생존 내지 출세를 위한 가부작정 가 족주의 원리를 몸으로 익혔으며 이것은 그들이 공장노동을 처음 시작하였던 1960 년 중반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여성공장노동자들이 공장노동에 본격적으로 적응해 갔던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에는 고도경제성장으로 생산 가정과 영역 이 엄격히 구분되는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에 따라 새로운 형태의 가부장적 가족이 등장하게 되는데, 경제 생산자인 남성의 노동과 공적 정체성에 기생하는 가정 주 부 중심의 핵가족화가 본격화된 1970년대 중반에 바로 이들이 ‘적합한’ 혼기-20대 중반 정도-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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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 논문에서는 그 동안 여성공장노동자들을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에의 ‘희생자’에 불과한 나약하고 수동적이며 정태적인 존재로만 바라보거나 70년대 후 반 일어난 여성노조운동의 거룩한 순교자로 바라보는 이분법적인 인식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며 다른 관점에서 여성공장노동자들을 이야기 해보고자 하였다. 그 동안의 여성공장노동자들에 대한 연구는 70년대 후반의 여성노조운동에 집중되 어 체재변혁파라는 면에서의 좌파적인 경로에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연구만으로는 노조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기 이전의 여성노동자들의 삶이나 또는 노조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던 이들에 대해서는 충분한 설명을 할 수가 없었

다. 물론 여성노조운동에 참여한 이들은 수적으로는 적으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상 징성을 지닌 집단이긴 하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 중산층 중년여성들이 가지고 있는 가족의 규범이나 여성성의 기준을 만든 이들은 노조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 했던 사람들이나 자립적인 임금노동자로서 힘겹게 살았던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오 히려 결혼에 의해 사회 경제적으로 상향이동하며 기존의 가부장적 질서에 편입되 었던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연애 결혼의 대두로 인한 새로운 가족 형성기에서 1960, 70년대의 미혼 여성 공장노동자는 결혼을 주요한 계승상승 전락과 생존전략으로 삼고 있었으며, 이러 한 전략의 실행에 충실하기 위해 자신의 여성다움의 재현을 강조하고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여성성을 충실히 내면화시켜나가면서 가부장적 질서를 더욱 강 화시키는 공모자가 되어간 것이다. 또한 그녀들의 생존 전략이었던 결혼을 유지하기 위해 ‘사랑받는 아내’로 변신한 여성 공장노동자들은, 남성주변의 생활 구성자로의 역할을 성실하게 해내는 존재가 되어 갔다.

이렇게 성별화된 노동이 정착되고 시행

되면서 여성들의 내면과 외모는 남성배우자의 욕망과 시선에 따라서 가꾸어지도록 되 었으며, 결혼(가족구성)으로 집안에 안주하여 집안의 가사노동을 담당하는 것이 정상적 인 여성의 역할로서 정상적인 여성다움을 지닌 것으로 강제하는 사회 문화적 기제가 작동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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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 on the formation of modern feminity : the experiences of unmarried female factory workers in Korea

Jun, Haejin Dept. of Sociology Graduate School Yonsei University

The goal of this study is to examine the formation of modern feminity in Korea through the experiences of unmarried female factory workers. Women were massively driven to manufacturing factories between the mid-1960s and 1970s as Korean industrial structure began to change. They experienced a transition period of patriarchy. They were accustomed traditional patriarchy in childhood and even until they started to work. Later, however, new form of patriarchy emerged. In the late 1960s and the early 1970s, production and consumption began to be segmented, and family became involved in only consumption activity. As a result, the formation of nuclear family was accelerated, in which women came to depend on men's labor. In this period, female workers reached the age of marriage. Former studies have had limit by looking the women dichotomously. Some studies have regarded the women only as helpless and passive victim of patriarchy while others have looked them as martyrs of feminist movement. This study tries to overcome this dichotomy by researching the role of female factory workers in the formation of modern feminity. It is found that th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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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re neither helpless victim nor fighters against patriarchy. They actively strived to enter higher class through love and marriage. In this process, they formed the norm of middle and standard of feminity. They achieved successful marriage by making every effort to restore their feminine beauty. Factory was considered the place to ruin feminity in this period. Female workers were labeled "Gongsunyi" and thought as abnormal women in contempt. However, their income was not enough to achieve economic independence. In this situation, they took advantage of familism for a higher social position rather than standing against patriarchy. They tried to remove out the image of factory workers and make themselves up to be more attractive in marriage market. In this process, they became accomplices in enhancing patriarchic ideology. They endeavored to be cultured women and lovely wife after marriage. They readily accepted and internalized a marginal position under husbands' safegu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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