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l Barth Christology (in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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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ller Theological Seminary School of Theology

Karl Barth’s Christology Research

A Report Presented in Partial Fulfillment Of the Requirements for the Course ST502 Systematic Theology 2 (Christology & Soteriology)

By Chris T. Choe May,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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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의 저서로는 ‘교회 교의학’과 ‘로마서 요해’이며 이 글들은 그를 대표하는 글들이다. ‘교회 교의학’ 같은 경우는 방대한 내용의 글들로 상세하고 짜임새 있게 만들여졌고, 또한 그의 신학은 계속해서 점진적으로 변하기에 더욱 그의 기독학은 이것이라고 단정짓기는 거의 무리가 아닐까 싶다. 흐르는 물에 이끼가 끼지 않기에 맑은 바닥을 볼수 있듯, 마침 그렇게 흐르는 물속에 밑의 바닥을 보는 마음으로 정적인 바르트의 신학을 통해 그가 바라본 기독학의 관점을 이해하고, 그가 이해하였던 그리스도를 향한 노력을 통해 기독학을 심충적으로 이해하고자 이렇게 필기하게 되었다. 정통주의 신학이란 ' 기계적 영감설' 즉 성서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시작해서 성서의 무오류설의 철저한 주장과 이 주장을 포함한 사람의 완전 타락설, 모든 사람은 죄인이므로 하나님의 은총과 선택의 필요성, 전적 부패 교리와 그로 인해 예수의 필연적 인류의 속죄를 위해 수난한 대속교리가 특징인 것을 말한다고 하겠다. 하지만, 계몽주의의 출현으로 인간의 이성이 부각되며 강조되고, 역사관도 역사의 진보를 신뢰하는 낙관적인 역사관으로 점진적으로 바뀌면서 유럽 교회에도 정통주의 신학에서 자유주의 신학으로 신학 흐름의 판위가 급히 바뀌게 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특징으로는 성서를 인간의 종교적 경험을 기록한 문서로 보는 성서관, 즉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쓴 책으로 해석하였기 때문에, 성서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보는 주장하는 내용들이 팽배하게 되었다. 이를 동반하여 이성에 맞지 않는 성경의 내용을 거부하며 이성에 대한 신뢰를 거듭 강조하며 나섰다. 그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는 보편적 성향이 지배적이게 되었고 급전진적으로는 예수를 역사적인 예수가 아닌, 도덕적 이상형 으로서의 예수를 재조명 하려는 시도 또한 곳곳에서 시도되었다. 이러한 방향은 결국 예수가 세상의 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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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해서 죽었다는 교회의 전통적인 속죄론을 완강히 거부하는 차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윤리와 도덕의 강조가 중요시되고 두드려졌다. 자유주의 신학이란 바로 이 18 세기의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등장한 기독교 신학을 말한다. 1 차 세계대전까지가 자유주의의 신학의 꽃을 피우는 시기였다고 한다면, 가톨릭교의 한 신학자의 말처럼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핵폭탄이 떨어뜨린 장본인이라고 설명되어지는 칼 바르트, 그의 신학은 과연 그들의 신학과 어떠한 급진적 도전을 하였고 무엇을 강조하였는지 깊이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신 정통주의 (Neo-Orthodox)의 창시자, 또는 말씀, 또는 계시의 신학으로 더욱 알려진 칼 바르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에 관련하여 이야기한다면 늘 그는 삼위일체가 먼저 모든 것의 출발점이라는 것이 특징이라고 하겠다. 칼 바르트에게 있어 하나님의 말씀은 역동적인 것이었다. 어떠한 교리나 언어 또는 진술로서의 존재의 가치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 현시점에 일어나고 있는 특별한 사건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구 정통주의가 범한 부각되는 심각한 오류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마치 죽은 주검을 해부하고 연구하는 것처럼 인간이 분석하고 조사할 수 있는 어떠한 아무런 반응과 움직임이 없는 정적인 경전쯤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간단히 예를 들어 과학자는 번개를 만들어 낼 수도 없고, 연구를 위해 그 빛을 실험실에 잠시 일초 동안만이라도 잡아 둘 수도 없다는 것이다. 과학자는 오로지 번개가 치는 순간에 그것을 관찰할 수 있을 뿐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 또한 현재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사건인 것이다. 성경은 정지되어 있는 정보들을 가득 담은 무의미한 어떠한 안내문의 용도가 아니라 우리의 응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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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구하는 역동적인 사건이라는 것이다.1 바르트는 이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3 가지로 분류를 하게 되는데, 성경을 통해 우리가 개인들의 응답을 요구하는 역동적인 사건의 말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자신을 직접 계시하신 하나님의 사건의 그리스도를 통한 말씀, 그리고 오늘날 교회에서 지금 현시에도 선포되고 있는 말씀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증거된 말씀, 즉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선포되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 바로 칼 바르트의 핵심의 말씀 신학이라고 하겠다. 바르트가 이야기하는 계시에 대하여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에 있어서 자연을 깊이 관찰하고 또한 그 모든 자연의 운행하는 순리를 관찰하게 된다든지, 사람에게 태어나면서부터 있는 본질적으로 인지된 철학, 예지, 판단력, 양심, 하나님을 아는 인지 등은 충분히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다의 일반계시가 있고 또한 특별계시, 즉 하나님의 우리 인생 가운데 선포된 말씀, 이적이나 역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 계시에 관련한 통상적으로 이해되는 넓은 범주의 계시의 내용이다. 이에 관련하여 칼 바르트의 친구이며 동지였던 에밀 브루너는 그의 저서 <자연과 은혜>를 통해 바르트와의 관계를 청산하였다고 한다. 브루너는 계시에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주장했다. 하나는 창조에 나타난 계시이고, 다른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계시이다. 창조는 자연 신학을 성립시키는 데 충분치 않을 수도 있지만, 복음과 만날 수 있는 "접촉점"을 아주 이상적으로 마련해 주고 있다고 하였다. 칼 바르트는 그의 저서 <그것이 아니다>를 통해 모든 그의 주장을 뒤로 한 채 오로지 역사 속의 한 인물인 나사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형태, 그 자체로써의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자기 계시만이 계시라는 새로운 정의를 내리게 되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계시 행위이며 하나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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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 토니 기독교 인물 사상 사전 (Seoul, Korea: 홍성사, 2002), 361~369 4

자기 자신을 이 계시 행위와 동일시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는 하나님의 행위인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떠난 그 어떤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 탐구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2 칼 바르트는 그리스도를 ‘계시자’라고 칭하였다. 이 계시의 사건은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와 별개 존재로 있으면서 하나님 아버지를 계시 행동의 대상으로 한 사건이라는 뜻의 개념이 아닌 것을 명백히 강조하며 '하나님 자신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해 준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말에는 매우 깊은 뜻이 포함되어 있음을 먼저 확인해야 한다. 만약 하나님이 자신 외에 당신을 계시해 주는 분이 있다고 한다면 그는 하나님보다 월등하거나 적어도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해야 한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명제라고 하겠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자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 외에는 하나님을 다른 어떤 이에게 계시해 줄 수 있는 존재가 없는 것이다. 그러한 뜻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사건은 하나님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을 통하여 계시한 사건이라고 한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니케아 신조를 높이 평가하며 그 내용에 충실히 따르고 있다. 우리는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는 하나님 독생자이시며 모든 세상이 있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하나님이요. 빛으로부터 나온 빛이요. 참하나님으로부터나온 하나님이시다. 그는 피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셨다. 그는 모든 것을 지으신 아버지와 동일동질을 가지신다. (니케아 신조). 3

2000 한국 바르트 학회에서 발표된 손영진 박사의 발표의 말을 인용하자면 바르트가 로고스의 성육신으로부터 그의 기독론을 기술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기독론의 존재론’을 규명하기 위한 것이다. 바르트는 기독론의 주체를, 즉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기독론을 논하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규명하기 위해서 이 방법론을 사용한 것이다. 이 규명의 필요성을 위해서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신성은 하나님 자신이 자신 안에서 주권으로 2 3

Barth, Karl trans. C.T.Thompson Church Dogmatic (London: SCM Press, 1949), 340 이종성, 삼위일체론을 중심한 신학과 철학의 알력사 (Seoul, Korea: 장로회 신학대학교 출판부, 2005), 173 5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주체라는 사실 안에 구성되어있다. 그가 계약의 주도자요, 제작자요, 유지자이며, 성취자다. 그가 주권적 주시다. 하나님의 내려오심 없이 인간의 올리움도 없다'고 말한다. 바르트에 있어서 기독론의 근본적 쟁점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요 화해자라는 데 있다. 그래서 바르트는 '만약 하나님이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함께 계시지 않는다면 예수 안에서의 하나님의 세상과의 화해를 무슨 의미로 말할 수 있겠는가?'고 반문한다. 바르트가 화해의 사건이 '이 인간 나사렛 예수 안에서 일어났다'고 분명히 말한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4

삼위일체와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하여 칼 바르트는 다른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심도 있는 깊은 탐구 시도가 아닌 하나님의 구원사를 배경으로 그를 요약하고 이해함으로 이 교리의 구원론적 연관성을 회복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바르트에 의하면 삼위일체론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맥락에서만 이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관련한 중심적인 이유로는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기 때문이기에 더욱 그러하다고 하겠다. 따라서 삼위일체의 신비는 오직 구체적인 이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역사를 통해서 적절하게 이해가 된다. 즉 하나님의 구원사건의 정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우리는 그 범주 내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바르트는 내재적 삼위일체의 우선성을 말하는 중심 요지는 바로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절대적 자유와 주권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그의 계시 행위에 있어서 주체자로 계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온 세상과 구별시키며 또 하나님으로 되시기 위해 결코 세계의 그 어떤 도움도 필요치 않으신다. 바르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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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진, Karl Barth 의 기독론은 '위로부터의' 기독론인가? 부산외국어대학교 겸임교수(조직신학) 한국 바르트 학회(2000.2.21) 에서 발표된 것임. 6

내재적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절대적 자유와 초월성을 존중하기 위해서 또 경륜적 삼위일체의 초시간적 근거가 되기 위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5 성자 하나님, 영원한 아들, 그리고 참하나님-참인간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해 바르트의 견해는 교회 교의학을 통해 성자 하나님, 영원한 아들, 그리고 참하나님-참인간의 세가지 중요한 부분에 대해 성실하게 설명하는 것을 볼수 있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방법론적 신학을 말한다고 한다면 바로 ‘위로부터’, ‘삼위일체론으로부터’, ‘주어진 계시로부터 출발’한다가 가장 지배적인 중심에 있는 성향이라고 하겠다. 그의 기독론은 고전적 그리스도론이 받아 들여졌고 삼위일체론의 교리가 그의 출발점이 된다.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의 내용은 교회 교의학에 있어서 결정적이고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함으로써 바르트는 예수의 위격과 신성에 관련하여 ‘입양’ 또는 ‘의인화’ 에 의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화해하는 자기 계시에 의해서 사람의 몸을 입은 주님으로 현시된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처음으로 가리킨다. 예수는 죄인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해준다. 인류 역사의 처음의 창조와 비교해 볼 때에 화해는 새로운 사역임에 틀림이 없다. 그것은 인간의 사역이 아니며, 비인격적인 계시자의 사역도 아니고 존재의 제 2 의 양태 속에 계신 하나님의 사역이다.6 칼 바르트는 교회 교의학 Outline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단순히 유사한 본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같은 본성을 가지고 계신,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신, 위격적인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 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지음 받았으며 그분이 우리 사람들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즉 위로부터 내려오셨습니다.” 우리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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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만, 현대 삼위일체론 연구 (Seoul, Korea: 대한 기독교 서회, 2003), 49~58 브로밀리, 제프리. 칼바르트 신학개론 trans. 신옥수 (Seoul, Korea :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4), 42 7

내려오신, 이 위격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런 방식으로 초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이것은 그를 자신의 기독교 신앙고백 안에서 고백하였으며, 그것을 그렇게 보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하나의 도전이 되었습니다. 7

바르트가 영원한 아들됨의 발전에 관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의 문구는 대부분 초기 사도들의 고백의 내용이였던 니케아 선언에 그의 근거와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다시 말해 오직 한분 주님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다. “독생자” 로서 그는 유일하신 분이며 한분의 하나님이 강조되고 있는 부분인것이다. 모든 시간에 앞선 분이라는 것은 우리를 위한 존재 그 이상의 존재라는 것을 가리킨다. 만들어진 것이 아닌, ‘태어난’ 이라는 표현은 피조성을 거부하고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의 파생을 확립하고 확실히 확고하는 것이다. 하나의 동일한 본질의 표현은 비록 그것이 신성에 대한 유일성 속에 있는 최종적인 이해를 능가할지라도 아리우스주의와 종속론을 거절한다.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지은 바 되었으니’ 라는 표현은 구별 속에 있는 진정한 신성과 또한 창조와 관련된 화해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훌륭하고도 시의 적절한 문구 속에서 바르트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존재 너머에 있는 우리 존재의 근거로 묘사하였다. 8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가 실로 그는 ‘참 하나님-참인간’(Vere Deus-Vere Home) 이라는 교회적 고백은 현재적으로 활동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고 하겠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참 하나님과 참 인간이 과연 무엇이냐는 것과 ‘그리고’ 라는 접속사가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해석이 모호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여기서의 ‘그리고’는 성육신의 총화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론(Christology)의 해석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이 동일한 방식으로 다시 말해 하나님과 인간이 만남으로서 그 근본적인 직무을 다하게 된다. 7 8

바르트, 칼 Dogmatics in Outline trans. 신경수 (Seoul, Korea: 크리스챤 타이제스트, 1997), 119 브로밀리, p. 43. 8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요 참 인간”이라는 것은 본질의 연합에 관한 고대 기독교 교회의 기독론의 근본 주장이었었다.9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한 본질을 갖고 계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기 때문에, 따라서 그의 인간 본성, 즉 그의 인간 존재도 역시 주권적인 결정이 온전히 완성되는 사건이다. 그의인성은 실제로 인성이며, 모든 인간의 본질이다. 개념이나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결정이며, 역사로서 그러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사람이시며, 모든 인간 존재의 척도와 결정과 한계이다. 그는 단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묵표가 무엇인지에 대한 결정이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고백은 에수 그리스도를 ‘우리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10

십자가, 부활, 그리고 은혜의 사건 칼 바르트에게 있언 온전한 죄사함 또는 속죄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며 이것 자체가 바로 ‘은혜’라고 말한다. 이 은혜는 하나님과 인간의 파기된 계약 관계 (Restoration of Covenantal Relationship)의 회복을 의미하는데, 이 계약의 회복은 하나님의 판단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하겠다. 하나님의 판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형틀의 고난과 죽음심과 또한 부활이라고 하겠다. 하나님의 판단에 있어 첫째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주 그리스도가 지신 십자가에서 나타나는 것이며 또한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십자가를 역사를 통해 온 인류의 죄는 용서받에 되는 계기를 확고히 마련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정의의 명시라고 하는것이 좋을 것이다 둘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회답이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대신해서 그리스도의 회개를 수락하셨다는 것을 계시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판단을 바르트는 믿음으로써만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9 10

Barth, Karl, The Doctrine of the Word of God, Church Dogmatics, I/2, Edinburgh : T.& T. Clark, 1936, p. 125. Barth, Karl, Dogmatics in Outline trans.신경수 (Seoul, Korea: 크리스챤 타이제스트, 1997), 123 9

지시인 죄사함은 그리스도의 사실을 믿음으로만 해결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 그의 자녀로서의 의무를 철저히 요구하시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지시이다. 이는 하나님 사랑과 이를 통한 이웃의 사랑이요 나아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 놓으신 원수 사랑인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바르트는 속죄의 완성을 하나님의 약속을 중심으로 해석하였다. 이는 바로 ‘부르심’인데 인간을 부르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론적 규정'이라고 하겠다.11

칼 바르트에 대한 반대적 견해에 관련하여 아돌프 폰 하르넥 아돌프 폰 하르넥의 강연의 내용이 곧바로 책으로 된 “기독교란 무엇인가?” 에서 주장하기를 헬라화 (Hellenization) 과정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순전한 기독교가 특히 사도 바울에 의해 ‘예수에 관한’ 종교로 변질되었고, 이것이 다시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 교리’로 변경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복음은 모든 면에서 그 최초 양식과 동일한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비록 복음이 각 시대마다 역사적인 형식을 달리하지만 영원한 진리를 담고 있는 경우이며 후자가 바른 관점이다고 이야기 하였다. 아돌프 폰 하르넥은 1920 년 어떤 학술 모임에서 칼 바르트와 함께 연설을 하게 될 기회가 있었는데 하르넥은 후에 고백하기를 바르트의 연설을 매우 인상적으로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말하기를 “그[칼 바르트]가 얼마나 신실한 인물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신학은 내게 두려움을 주었다.” 그리고 그후 ‘변증법 신학’의 저서에서 바르트와의 주고 받은 서신에서 이러한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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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윤성범. 칼 바르트, (Seoul, Korea:대한기독교서회,1993), p.167 10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의 가장 중심에 핵심으로 서있다고 한다면, 왜 이러한 복음을 기초하고 있는 사람이 사람들의 역사적인 학문을 통한 우리의 상상했던 주와 진정한 주님을 왜 일반적인 지식이나 견실로 이해가 되지 않는것이며 이러한 학문은 과학적인 신학을 통해 어떻게 달성될 수 있는가?” 12

라고 질문하였다. 이에 대해 바르트 대답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신뢰성과 사람됨의 근본적인 지식을 복음의 중간지점으로 하나님의 믿음의 일어남이라고 우리는 볼수 있다. 논평적 역사학 공부는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에 있어 사람들의 인지되는 지식의 범주에 있다는 것은 넘어설수 없는 한계이며, 그 의도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 자체가 모순이 있다. 우리는 아직 알수 없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역사적 예수를 찾아가는 것은 성경의 과학적 시도가 결국 막다른 골목에 서는 것에 대해서는 이미 알려진 바이다. 더욱 진보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차라리 공포에 떠는 것이 오히려 더 낮다는 것이다. 신학에 방법에 있어 이러한 것이 더욱 알맞는 신학의 방법으로 이해가 된다.13

그렇게 그 시대를 대표하는 자유주의 신학가들은 두 팽패한 철도위에서 서로 다른 노선을달리고 있었으며, 하드넥의 과학적인 접근의 신학방법론은 바르트의 믿음을 배경으로한 말씀의 신학과 다른 출발점에서 이야기가 되고 있기에 서로를 만족시킬수 있는 어떠한 정점을 찾기는 힘들었었다.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판넨베르크는 당시에 칼 바르트에게 직접적인 큰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몇가지 점에서 관련하여서는 바르트과 크게 대립을 보이기도 하였다. 내용에 관련하여서 특히 바르트와 불트만 그리고 그 밖의 다른 학자들이 신학을 역사 비평으로부터 분리 시키려 하려는 것에 대해 판넨베르크는 크게 반발하였다. 그는 주장하기를 ‘역사적 예수’는 덮어 놓고 무시하고 신학의 근거를 오로지 ‘신앙의 그리스도’에 두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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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nack, Adolf Von. The Debate on the Critical Historical Method: Correspondence Between Adolf von Harnack and Karl Barth; Fifteen Questions to those among the theologians who are contemptuous of the scientific theology, page 166 13 Barth, Karl. The Debate on the Critical Historical Method: Correspondence Between Adolf von Harnack and Karl Barth; Fifteen Answers to Professor von Harnack, page 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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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세기의 경향에 적극 반대하며 동의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근본적인 이유로는 바로 판넨베르크에게 있어서는 신학은 반드시 역사에 근거를 해야하며 다른 학문분야의 연구 결과물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하는것이 그의 주장이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은 사건이 오직 “믿음”으로만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복음을 인류의 지식이라는 공간에서 끌어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바르트가 ‘위로부터의 기독론’에 촛점이 맞추었다고 한다면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위로부터 임하는 것에만 국환이 되었다고 한다면, 판넨베르크는 ‘위로부터의 기독론’과 ‘아래로부터의 기독론’을 동시에 주장하였는데, 펜넨베르크는 전자를 주로 무시를 하고, ‘역사적 예수’로부터 시작하는 ‘아래로 부터의 기독론”에서부터 출발해 서 그리스도의 신성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보여 주는 중심에 있는 중요한 사건은 바로 부활이다. 만약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가 하나님께로 승천했기에 또한 그 때문에 세상의 종말이 시작되었다면,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예수 안에서 계시된것이다. 부활은 예수와 성부와의 연합을 보여 준다.14 이러한 입장으로 판넨베르크는 바르트의 주장과 계시와 말씀에 강력하게 밑바침되어 있는 주장에 양대 축의 벽을 이루는 신학으로까지 보아지며, 이에 관해 판넨베르크의 주장은 과히 방향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아래에서부터 위로의 방법으로도 서로가 팽배하게 다른 주장을 하는 것을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14

토니 레인, 402-405 12

바르트의 그리스도학에 관련한 나의 도달한 결론 연구를 통해 나의 도달한 결론으로 말하자면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의 밑바침이 되었던 역사적 예수의 탐구와 계몽사상을 바탕으로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는 보편화적인 성향과, 성서를 인간의 종교적 경험을 기록한 문서로 보며 성경의 오류를 인정한 자유주의 신학자들 이러한 근거로 인한 점진적 성향을 보여온 그 시대의 신학자들을 향해 ‘신 정통주의 신학’이라고 불여질 만큼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발전한 큰 계기가 되는데 신학의 역사에 한 휙을 그었다고 하겠다. 하지만, 몇가지 신학적인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은 바로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삼위일체는 신 안에 삼인격의 존재함이 아니라, 한 하나님의 존재의 삼양식을 말한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 성부는 성자를 떠나서 있을 수 없고 성자는 그의 모든 사역에 있어서 성부를 나타내며, 성신의 존재는 바로 성부가 성자의 아버지이고 성자가 성부의 아들임을 나타내는 어떠한 종속적 존재로 표현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러한 바르트의 설명은 삼위일체에 관련한 성신의 존재를 충분히 설명해 주지 못한다고 하는 오류가 있다.15 칼 바르트의 그리스도학에 관련한 주장과 그의 입장속에서는 가현론적이고 네스토리우스파적인 경향들이 함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바르트의 견해에 의하여 보게 되면 복음의 메시지란 삼위일체 내적인 사건에 관한 설명에 불과한 것으로서 현실적으로는 전적으로 신인 것임을 시사한는 한 가현론적 견해로 볼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이 그리스도의 인성은 결코 그의 신성과 동일시 될수 없으나 다만 그것에 대한 유추로 여겨질 수 있다고 한 점에서는 네스토리우스파적인 입장이라고 할수 있다.

15

(Cornelius Van Til, New Modernim, pp 224~225), 현대신학 연구 박아론 기독교 문서 선교회, 1997, 4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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